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르포- 시모노세키 길 위에 서다

후쿠오카공항을 지나니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창밖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든다. 바다 위 간몬대교를 지났다. 혼슈와 키타규슈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현해탄을 가로지르는 간몬대교, 우뚝 솟은 유메타워, 시모노세키 시내가 참 멋있다. 일본 제6항구답게 위용을 펼치고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시모노세키는 참 많이 아픈 땅이다. 불평등조약으로 상처를 주고, 조세이 탄광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죽어갔다. 우리에게 아픈 역사를 준 시모노세키에서 러브소나타가 열리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한일 양국이 과거의 아픈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화해의 손을 잡는 역사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 길 위에 섰다. 도시를 걸으며 이곳의 과거, 현재, 미래를 묵상했다.
예수 초상 밟고 지나가라
시모노세키는 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이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1549년이다.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신부가 이곳에 복음을 전파했다. 사비에르 선교사는 시모노세키에서 천황의 친척 야마구치를 만나 전도를 허가받았다.
1637년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30만 명 넘게 늘어났다.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확장되고, 나가사키 지방에서 반란까지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낀 막부는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다리 위에 예수의 초상화를 펼쳐놓고 밟고 지나가도록 하여 예수의 초상을 밟지 않고 피해가는 사람들을 색출해냈다.
시모노세키 역에서 조금 떨어진 하기시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십자가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석상을 모신 곳도 있다. 시모노세키 역에서 JR을 타고 3시간여 거리에 있다. 역에서 1km 정도 걷다보니 도로 한 켠에 기독교 순교공원이 있었다.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목숨 걸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순교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잘 꾸며진 공원이었다. 나무와 돌, 주변 구조물들은 관리한 흔적이 엿보였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고 깨끗하게 정리해 둔 일본인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이곳이 사람들에게 잊힌 순교자들의 무덤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조선에 상처를 준 바로 그 곳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 다시 문화교류를 하고자했다. 당시 조선조정은 일본인들을 한양으로 오게 하지 않는 대신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그들이 바로 조선통신사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모두 12번에 걸쳐 일본에 다녀왔다.
1905년에는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페리도 운행을 시작했다. 시모노세키는 한일 양국을 잇는 해상 중심지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그렇게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마침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불평등조약이 바로 이곳 시모노세키에서 체결되었다. 한국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곳은 당시의 요정이다. 조약이 체결된 회의장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현지에서 만난 리키마루 츠구오 목사(키타큐슈시온교회)는 그 장소에 대해 “그곳은 일본의 패배의 유산으로 볼 때마다 겸허해진다”고 말했다.
백제와 왜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자신의 예순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천황 가문에는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다. 천황의 이 말은 한국과 일본의 인연을 이야기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은 통일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서먹해진 후다.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탄생하는 서기 300년 무렵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일본)은 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을 죽이면서까지 싸웠지만 백제와 왜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백제는 왜에 문명을 전해주었고, 대신 수시로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임진왜란, 시모노세키 불평등조약, 강제징용 등으로 무너졌던 한일 관계가 다시 정상화된 것은 1965년 한일협정 이후부터다.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일본에는 ‘가카라시마’라는 작은 섬이 있다. 200명 정도가 살고 있고, 2만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한다. 이곳에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오비야우라 동굴이 있다. 동굴 앞에는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라고 쓴 안내판이 있고, 동굴 옆 골짜기에는 갓 태어난 무령왕을 목욕시켰다는 우물도 있다. 가카라시마의 주민들도 백제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을 전해들은 충남 공주시민들이 모금을 해서 2006년 가카라시마 항구 가까이에 무령왕 탄생 기념비도 제작해줬다. 2012년에는 제주올레길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규슈 올레’가 만들어졌다.
러브소나타 울려 퍼질 때마다
이재훈 목사는 지난 5월 15일 시모노세키 시민회관에서 열린 러브소나타 집회에서 하나님과 사람,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이 놓은 화해와 평화의 다리를 건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같은 날 열린 크리스천CEO포럼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평화는 정치적 입장과 자국의 이익을 뛰어넘어 양국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쓰임 받을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한일 양국이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화해하면 좋겠다. 하나님이 내민 화해와 평화의 손을 붙잡으면 좋겠다. 그것이 러브소나타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스무 번 울려 퍼진 러브소나타를 통해 수많은 일본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의 가슴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졌다. 오키나와에서 시작된 러브소나타가 시모노세키에 울려 퍼지는 동안 과거의 아픔도, 그 어떤 이익도 내려놓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노래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렸다. 이것이 러브소나타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온누리교회는 끝까지 일본을 향해 손을 내밀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일본선교의 비전을 이뤄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에서 쓴 Acts29 비전이기 때문이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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