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6월은 호국보훈의 달, 나라를 지켜낸 기도의 어머니들

독립 운동에 앞장 선 마리아들    
2014 마리아행전 ‘거룩한 순결’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마리아행전 참가신청이 시작되자마자 마감됐다. 2,600여 마리아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을 준비를 마쳤다.
여성들의 기도 열기가 이토록 뜨거운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첫발을 뗀 1880년도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기도한 여인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의 어머니들 덕분이다.
여성들의 기도가 정점을 찍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당시 수많은 여성들이 가슴에 육혈포(탄알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와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이어갔다. 나라를 지켜낸 기도의 어머니들을 만나보자.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과부의 몸으로 독립운동 앞장선 여인 ‘조신성’

조신성

187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60리 떨어진 비현역 근처에서 태어난 조신성은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9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다. 16살에 당시 풍습대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생활 6년 만에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조신성은 22세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1897년 평북 의주에 있는 교회에서 선교사 배위량(W.M.Baird)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과부였기 때문이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당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여성들 중에는 과부가 많았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생계유지가 힘든 삶을 살던 과부들은 자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기독교에 의지했다. 성경 말씀에 약자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신성도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에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창덕궁 방 한 칸을 빌려 이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했고, 폐교 위기에 처한 평양 진명여학교를 번창하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에는 비밀사령을 받고 북경으로 떠났고, 1919년 11월에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맹산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신민회에 참여하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헌남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했냐’고 묻자 “가슴에다 육혈포과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사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속을 며칠씩 헤맸다.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했다.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 격투하거나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있었다”고 대답했다.

 

여성 독립투사 김마리아와 그의 고모 김순애

김마리아

김순애

“아무리 모질게 나를 고문해도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빼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형사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선 여인 김마리아가 한 말이다.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1896년 김마리아는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에 들어가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다. 을사조약 이후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1910년에는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했다. 1918년에는 2.8독립선언문 십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추고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왔다. 이후 대구에 가서 기독교 동지들을 찾아 2.8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일을 했다. 임시정부에서도 활약했고, 미국 유학 중에는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3년 김마리아는 조국 독립의 염원을 꿈꾸며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일제 순경들의 감시와 압박으로 서울에서는 활동하지 못했고, 원산의 마르다윌슨 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강의했다.
그녀는 종교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끝까지 항일투쟁을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죽음을 맞이한다.
김마리아의 가문에는 또 한 명의 여성 독립투사가 있었다. 김마리아의 셋째 고모 김순애다. 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출생했고, 1910년 경술국치(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 당시 부산에 있는 초량소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년 7월 이화숙, 이선실, 강천복, 박인선, 오의순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그녀가 회장으로 재직한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외 애국부인회과 긴밀하게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 마리아행전 ‘거룩과 순결’
일시: 6/25~27
장소: 서빙고 온누리교회
강사: 이재훈 목사, 김회권 교수, 김수지 선교사, 주누가 선교사, 김윤희 박사, 에디변 목사, 이태희 변호사 등
문의: 02-3215-3355
<책 소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에 관한 연구보고서

 

<조국과 여성을 비춘 불멸의 별 김마리아> (김영란 지음/북산책)

 

<조국과 여성을 비춘 불멸의 별 김마리아>는 조국과 여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친 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됐다.
김마리아는 적국인 일본에서 동경유학생들이 일으킨 2·8 독립선언식 후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미리 배포하여 근대 민족운동인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며 마리아의 애국충정의 마음을 기렸다.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