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우리가 가야 할 낮은 곳은 어디인가?
낮아짐에 관한 신학적 묵상 _ 다시 섬김으로, 다시 십자가로
‘낮은 곳 더 낮은 곳’은 십자가 신학을 압축한 슬로건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 … 하나님 만나는 곳 가리키는 나침반
2015년 온누리 교회 표어가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다. 우리가 가야할 낮은 곳은 어딜까? 왜 우리는 낮은 곳으로 가야할까? 도대체 ‘낮은 곳’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높은 곳은 무엇일까? 이 글은 몇 가지 신학적 관점에서 낮아짐과 높아짐의 의미를 묵상해 본 것이다.
성경적 인간학에서 본 낮아짐: 인간은 흙먼지로 지어졌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고 말한다. 먼저 창세기 2:7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흙에서부터 먼지를 취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그래서 영어 성경 RS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then the LORD God formed man of dust from the ground…”). ‘흙’(히브리어 ‘아다마’)으로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그의 이름이 ‘아담’이다. 인간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철저히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보잘 것 없고 약하며, 유한하고 허무한 피조물이다. 다음 시편의 말씀은 이런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개역한글. 시 103:14). 주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는 우리의 체질(體質), 즉 우리 몸의 재료가 진토(塵土), 먼지(티끌)임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가톨릭 신부는 신자들의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먼지와 같이 허무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그러면 인간이 언제 흙에서 인간이 되었나?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을 때(창 2:7) 비로소 ‘생령’(a living being), 즉 살아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그 숨을 되찾으시면 우리의 인생은 끝난다. 누가복음 12:13-21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다’라는 말에 주목하자. 죽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모태에서 지으실 때 주신 ‘영혼’(= 생명. 헬라어로 ‘프쉬케’)을 도로 찾으시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언제 도로 찾아가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질은 유한함이지만, 그 유한함이 어리석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생명을 도로 찾아가실지 그 때를 알지 못함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왜 어리석은가? 부자의 문제는 자신의 재산을 ‘여러 해 동안’ 누릴 수 있다는 착각에 있다. 헬라어 원문은 단순히 그저 ‘여러 해’ 정도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이다. 조금 보태서 말하면 ‘평생토록’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밤 당장’이라도 그의 영혼을 찾아 가실 수 있다(‘여러 해 동안’과 ‘오늘밤’이라는 단어의 대조에 주목하라!). 언제 하나님이 다시 찾아가실 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재물이 하나님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영혼을 오늘 밤 찾아가시면 부자가 먹고 마시며 즐기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은 아무 쓸데가 없는데도,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부자는 말한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즐기자”고. 그래서 부자는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성경적 인간학에서 본 높아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창세기 1:26-28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뜻을 알려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가리킨다는 견해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26절), “땅을 정복하라”(28절),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절), “모든 채소와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29절) 등등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간이 위임 받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비록 흙먼지로 빚어진 피조물(가장 낮고 하찮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장 높혀진 소중한 존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양면성이다. 그래서 ‘시편의 인간학’ 혹은 ‘시편의 창조론’이라 불리는 시편 8편도 이렇게 말한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 8:5-6).
진흙과 하나님의 형상! 이 두 가지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을 진흙으로만 이해하면 자기비하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이해하면 교만해질 수 있다. 미국의 크리스천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라는 책에서 ‘교만과 수치(자기 비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둘은 달라 보인다. 교만은 가슴을 내밀대로 내민다. 수치는 고개를 숙일대로 숙인다. 교만은 뻐긴다. 수치는 숨는다. 교만은 내보이려 한다. 수치는 달아나려 한다. 이 때문에 당신은 이 둘이 자매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속지 말라. 두 감정은 출신이 같다. 파급 효과도 같다. 교만도 수치도 당신을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교만은 말한다. ‘넌 이렇게 착한데 하나님을 찾을 필요 있니?’ 수치는 말한다. ‘넌 너무 악하고 추해서 하나님께 갈 수 없어.’ 교만은 당신을 몰아낸다. 수치는 당신을 가둔다. 교만이 넘어지게 하는 앞잡이라면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낮아짐-높아짐-다시 낮아짐: 샬롬 신학에서 본 낮아짐과 높아짐의 변증법
앞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러나 이 통치는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일체가 되시듯, 사람도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을 돌보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런 관계가 온전히 이뤄진 상태가 바로 ‘샬롬’이다. 샬롬은 단지 마음의 평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가 온전한 상태, 그것이 샬롬이다. 에덴동산은 샬롬으로 충만했다. 아담은 하나님과 대화했고,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고백하며 사랑했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아담의 다스림을 받으며 풍요로움을 주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3:5) 될 수 있다는 뱀의 간교한 꾀임에 넘어가 죄를 범한다. 흙먼지로 만들어진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교만했을 때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자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죄의 다스림을 받는 죄의 종이 되었고, 그 마지막은 죽음이었다. 죄가 왕노릇 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대신 우상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지배하고 군림하려 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돌보기보다 부족과 궁핍을 채우기 위해 수고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샬롬’이 깨진 것이다. 샬롬이 깨진 상황에, 곤고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인간. 성경은 이런 인간의 실존을 ‘낮아짐’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빌 2:8)셨다는 것은 인간의 곤고한 실존에 들어오셨음을 뜻한다(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인간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서 낮아지셨다).
높여 진 인간, 회복된 샬롬
그러나 하나님은 낮아진 인간을 다시 높이셨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부르시고 이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또한 건강, 물질,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심 등의 축복도 허락하셨다. 샬롬을 허락하신 것이다. 회복된 샬롬, 이것이 구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단위로 확대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 인류로 확대된다.
특히 에베소서 2:4-6에 따르면 하나님은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셔서 ‘하늘에 앉히시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늘까지 높이셨다! 종말에나 이뤄질 사건이 예수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다(엡 1:5, 11; 롬 8:16-17).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엡 1:3)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양(羊)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던 것이며,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그것은 샬롬의 회복이었다. 그래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워 주셨다. 또한 ‘평안히 가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평안 속으로 들어가라”(go into peace)이다. 병마에 얽매여 12년 동안 사람답게 살지 못한 그녀가 마침내 샬롬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낮아짐, 샬롬의 회복 이루는 변혁적 실천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높아짐과 낮아짐은 먼저 하나님과 나(우리)와의 관계에서(구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도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높여진 사람들로서 샬롬을 누리는 자들’이다. 반면에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세상은 샬롬이 깨어진 곳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보내 깨어진 샬롬을 회복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 깨어진 샬롬을 회복하셨듯이 이제 우리를 보내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악으로 곤고해지고 낮아진 세상을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풍요롭고 존귀한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다. 이것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계 21:5)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것은 교만으로 인해 곤고한 상황으로 전락하는 낮아짐이 아니라 낮아지신 하나님을 본받아 스스로 낮아져 세상을 회복하는 변혁적 실천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혁명을 일으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다. 출애굽의 구원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으며 그들이 감독관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내려온 것이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출 3:7-8).”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내려오셨다. 내려오셔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내고’,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물론 출애굽의 지도자는 모세다. 그러나 그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직접 내려오신 하나님이시다. 태초부터 계셨고, 창조자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3, 1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요 1:12)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빌립보서 2:5-11에 따르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이시오, 자기를 낮추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신 당신의 아들을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만물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이런 둘째 아담 예수님의 모습은 첫째 아담과 정반대다. 첫째 아담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도 아니면서, 근본이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감히 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됐다. 모든 인간이 가장 곤고한 상태, 가장 낮아진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성도가 낮은 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 낮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악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도는 낮아져야 한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어야 한다. 십자가는 낮아지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 ‘낮아짐의 locus classicus’다.
낮아짐의 실천적 행위 ‘섬김’
복지국가와 하나님 나라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의 화두는 ‘복지’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연일 ‘무상복지와 증세’ 문제를 놓고 날 선 논의가 무성하다. 어떻게 복지를 이룰 것인가, 아니 근본적으로 복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이제 ‘복지국가’는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이 된 듯하다. 그러나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은 복지국가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다. 필자는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이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가 단지 복지 국가 구현을 위한 교회적 노력이라고 보지 않는다.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의 지향점은 복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우리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찾아가 물질을 나누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은 단순히 부의 분배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피폐한 인간 실존을 긍휼히 여기셔서 샬롬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의 실천적 모습을 ‘섬김’으로 표현하셨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섬긴다’이다. 왜 성도는 낮아져서 세상을 섬겨야 하나? 섬김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섬김의 극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세상을 구원한다. 샬롬을 회복시키신다. 십자가는 연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비록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겠고, 해괴한 사랑으로 들리겠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놀라운 사랑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결국 섬김으로 표현되는 사랑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보여주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낮은 곳 더 낮은 곳’은 십자가 신학을 압축한 슬로건이다. ‘낮은 곳 더 낮은 곳’은 스스로 낮아지셔서 샬롬을 회복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 최원준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