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남긴 거라곤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 장갑 한 켤레

 

 

 

 

“사람은 죽으면 돈을 남기고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기업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재벌인 그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외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공부 시켰으니 스스로 살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딸 유재라에게는 땅 5천 평을 물려주며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했단다. 유재라는 1991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상을 떠나며 200억 원대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2대에 걸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소년 유일한, 미국에 가다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경상북도 예천 사람이었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장사꾼 기질이 있었다. 평양에서 옷감 장사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유기연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크리스천이었다. 선교사를 통해 서양문물의 훌륭함을 알게 된 그는 세상을 보는 눈도 남달랐다. 어느 날 선교사가 그에게 “조선의 아이 몇몇을 뽑아 미국에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 나라에 필요한 일꾼으로 키울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눈이 뜨인 유기연은 아들 유일한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당시 유일한의 나이 9세였다.

유일한은 미국 네브래스카 주 ‘커니’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그가 헤이스팅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생활이 어려워진 아버지가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유일한은 학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침에는 신문배달, 저녁에는 구두를 닦기도 하고 상점에서 일했다.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를 했다.

 

대한민국을 이롭게 하려는 꿈

 

당시 한국은 일제에 의해 온갖 협박을 당하며 을사조약을 체결했고, 국권을 강탈당했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군대도 강제 해산됐다.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재미동포들도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한인 자치단체들을 개편해 국권회복운동을 해나갔다. 유일한 주도로 1909년 6월에는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설립되었다.

1916년 미시건 주립대학에 입학한 그는 아르바이트로 무역업을 하던 중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와 미주동포들은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해 고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유일한은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어느 정도 사업자금이 모이자 그는 미국의 사업체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가 당부했던 “나라 잃은 조국에 힘이 되는 무엇인가를 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또 일제 치하에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이롭게 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는 유한양행을 통해 아픈 사람들이 손쉽게 좋은 약을 구할 수 있게 했다. 교육 사업에도 기여했다.

그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이익조차 기업을 키워낸 사회에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돈을 만지면서도 “애초에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평생 지켜온 신념대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971년 3월 15일, 유일한이 생전 그토록 아꼈던 유한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그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학교 구내에 묻혔다. 그가 남긴 거라곤 낡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 조그만 장갑 한 켤레였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