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고난주간을 보내는 크리스천들의 자세
죽음 없는 부활 없고, 고난 없는 영광 없다
예수님의 죽음 본받아 십자가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방법
남보다 먼저 희생하고, 순종하고, 겸손하고, 섬기고, 용서하기
오늘(29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수난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간을 의미한다. 고난주간은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인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호산나’라고 찬양하며 경배했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그런데 세상적, 정치적 호산나를 소망하는 군중들의 외침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변하는 데에는 불과 5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자신을 따라 다니며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꿈꿔왔던 사람들의 배척과 배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 6:66).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수많은 기적과 표적의 퍼포먼스가 막을 내리자, 열광하며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다녔던 팬들은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갔다.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공연이 끝나자 화를 내며 분노를 표출했다. 바로 그 분노(정치적, 종교적)의 정점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예수님은 왜 고난과 핍박을 감당하셨을까?
이에 대한 답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내하며 십자가를 지셨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도래(7:14, 9:1~7, 11:1~10), 중반부에는 메시아의 사역(40~50장), 하반부에는 종말론적 메시아의 나라(55~66장)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 53:10~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바로 그 뜻은 메시아가 스스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사 53:12, ‘자기 영혼을 버려’)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고 그로 인해 그들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공표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메시아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역설적 이유를 53장 5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첫 번째로 메시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때문이다. 메시아가 받아야 하는 고난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대속적 찔림이요, 상함이요, 죽음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는 두명의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있었다. 그 두 강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가 바로 우리가 매달렸어야 할 십자가였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할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또 다른 십자가로 인해 대속의 은혜를 받았다. 바로 그 십자가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묵묵히 짊어지신 십자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6시간 뒤에(오전9시에서 오후3시까지)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문헌을 보면 보통 성인 남자들 중 아무리 연약하다 할지라도 최소 하루 이상은 십자가 달려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 왜 예수님은 단지 6시간밖에 못 버티셨을까? 십자가 지시기 전 로마 군인들의 채찍과 매질 속에 이미 많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의 양 어깨에 짊어지신 나와 여러분의 죄의 무게가 예수님의 심장을 짓눌러 그렇게도 빨리 운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거웠으면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고 시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예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시 22:15).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유월절 양이 온전히 구워지듯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구워내는 극한 십자가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셨다.
두 번째로 메시아의 ‘징계 받음과 채찍 맞음’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평화와 나음’을 주었다. 메시아의 고난은 단지 죄를 대속하는 은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이 땅에 온전히 선포하며 이루었다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역설적 진리를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아들로 인해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골 1:20).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주심을 통해 모든 만물과 화목의 관계(reconciliation)를 온전히 회복하는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의 관계(영적죽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인해 다시 회복(reconciliation)된 것을 의미한다. 이 샬롬의 축복으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화목의 관계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저희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축복인 것입니다”(롬 8:15, 갈 4:6).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가져다 준 은혜의 선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생의 축복,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은혜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고난이 가져다 준 역설적 선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바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왕노릇했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롬 5:17).
십자가 고난의 역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가?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오늘 성경을 배우고 싶다면 먼저 역설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인류 역사 속에서 보여지는 역설의 극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십자가가 보여주는 역설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서는 그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마침표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부인할 수 없다. 불변의 진리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 창시자들도 결국 죽음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 오직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 전대미문(前代未聞) 경이로운 사건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막 16:1~6).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곧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예수님의 부활된 몸을 만져본 제자도 있었고(요 29:27, 28), 그런 제자들과 예수님은 함께 먹고 마셨다(행 10:41)고 증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기록 속에 무엇보다도 주목을 끄는 대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후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으니 그 가운데 대부분이 지금도 살아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습니다”(고전 15:6)라는 증언이다. 바로 수백 명의 목격자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사도 바울의 언급 그 자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참이요 진실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 법정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눈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진술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한두 명도, 수십 명도 아닌 수백 명의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 외에 그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할지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는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이 질문에 ‘아멘’으로 화답하게 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고 영광이자 소망이라는 그 역설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포하고 있는 진리다.
메시아의 고난 받으심이 말하는 메시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고진감래, 새옹지마, 전화위복 등 많은 용어들을 만들어 고난이라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예외 없이 고난 앞에 서고, 인생의 굴곡마다 시련과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고난의 원인을 크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성화적 연단에서 찾고 있다. 그럼 믿는 성도들은 그들이 처한 고난과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올바르게 대처하고 있는지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고난 속에 거하며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동안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의 이유를 좀처럼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고난 받으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성명말씀(롬 8:17, 빌 1:29)을 읽으면서도, 고난이 ‘나’라는 일인칭의 문제로 다가올 때에는 ‘왜 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질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들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사실 성경은 각각의 성도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고난의 모습 모두를 열거하며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거시적인 이유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친히 받으신 그 십자가 고난이 성도들의 고난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척도다. 이 진리에 의거해 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대속 받은 성도들은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 고난 받는 일이 없도록 항상 영적으로 조심하며 깨어있는 민감함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성도들의 고난은 다시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경고다. 고난은 하나님보다 세상 물질문화와 가치관을 추구하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인 것이다. 땅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부르심인 것이다(고후 1:8~9, 골 3:1~4).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역설적 진리(히 12:6)이며,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징계이며, 그로 인해 의의 열매(사 32:17)를 맺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히 12:10~11). 고난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성도들에게 이루게 하려는 하나님의 ‘가장된 축복’이다(고후 4: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성도들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롬 5:3~4) 믿고 깨닫고 경험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는 삶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2000년 전의 제자들에게만 권면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전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에 ‘네’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고난이 없는 십자가를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왜 나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가’라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게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내 십자가가 더 무거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정답임을. 그래서 십자가는 불평하면 불평하는 만큼 더 무거워진다. 원망하는 만큼 더 무거워진다. 하지만 감사하면 감사하는 만큼 더 가벼워지는 것이 십자가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십자가를 스스로 기꺼이 지기에는 너무 두렵고 무섭고 참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두고 “내 마음이 십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그토록 피하고 싶으셨던 십자가. 그러나 결국 그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나와 여러분이 영생의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고가면(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고간 구레네 시몬처럼)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의 주인이 일인칭인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 바로 그런 정답의 삶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그 십자가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먼저 보여주셨듯, 남보다 먼저 희생하며(사 50:6, 롬 5:8), 먼저 순종하며(요 3:36, 행 5:32), 먼저 겸손하며(마 23:12, 엡 4:2), 먼저 섬기며(막 10:43~45, 벧전 4:10), 먼저 용서하는 것(마 18:22, 막 11:25)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요 12:34~35, 요일 4:8). 예수 그리스도께서 묵묵히 고난을 감당하신 십자가는 바로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도 역사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에 ‘현재의 고난이 장차 저희들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롬 8:17,18)을 고백하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이 고백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고후 1:5, 빌 3:10~11)를 받게 되길 소망한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성도들의 삶의 소망과 영광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이다.
/황재명 목사(강남A공동체)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