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 온누리교회와 아웃리치
온누리교회는 태생이 떠나는 교회
교회 창립 전부터 아웃리치 다녀 … 세상과 교회와 함께 울고 웃었다
행함 강조하고, 구호 외치는데 그치거나 일회성 아웃리치 철저히 지양
“와, 여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산으로, 바다로, 유명 관광지로 피서를 떠난다. 온누리교회 성도들도 떠난다. 그런데 남들과 조금 다른 곳으로 떠난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피서 대신 복음 전하러 산 넘고, 바다를 건넌다. 성인공동체, 대학청년부, 차세대, 캠퍼스 등 너나할 것 없이 한 마음 한 뜻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복음을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물을 물들인다. 여름휴가를 아웃리치로 대체해도, 상당한 경제적 지출을 해도 아깝지 않다. 그만큼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여름 아웃리치는 특별하다.
아주 특별한 기획을 하나했다. 온누리교회 성도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아웃리치 역사와 의미를 정리했다. 알고 떠나면 온누리교회 여름 아웃리치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온누리교회와 아웃리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아웃리치를 논하지 않고서는 온누리교회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다.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세워졌다. 하용조 목사는 교회 초창기부터 성도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위해 떠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선교요, 아웃리치다.
1985년 7월, 12가정과 그 자녀들이 어도 형도교회로 아웃리치를 다녀온 것이 시초다. 1987년 7월 12일에는 탄불도교회로 아웃리치를 다녀오는 등 초창기부터 다른 교회를 돕는데 힘을 모았다. 어도 형도교회 아웃리치는 온누리교회 창립(1985년 10월 6일) 전에 다녀왔고, 탄불도교회 아웃리치는 입당예배(1987년 7월 19일)보다 먼저였다. 온누리교회는 태생이 떠나는 교회다.
아웃리치가 예수향기회를,
예수향기회가 긍휼사역과 복지재단으로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는 긍휼구제사역의 모태가 되었다. 교회를 돕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과 함께 울고 웃는 데까지 지경을 넓혀 갔다. 예수향기회가 그 대표적 사례다.
예수향기회는 한 성도의 헌금으로 1994년 탄생했다. 이후 7년 동안 2만 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40만 명의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이것이 온누리교회 긍휼사역의 시초다. 예수향기회의 활약은 단순히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5년 6월 30일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도 예수향기회가 있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주저없이 출동했다. 당시 예수향기회 소속 230여 명의 성도들은 6일 동안 구조대원들에게 24시간 동안 식사와 간식을 제공했다. 무려 2천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외에도 성수대교 참사, 가스 폭발사고 등 연이어 터진 사고현장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재난과 사고 현장에서 보여준 온누리교회의 선한 영향력은 1996년 ‘한국기독교재난구조협의회’를 창설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20개 교회, 국제기아대책기구,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 24개 단체가 모인 단체다.
1999년 8월에는 예수향기회가 모태가 되어 온누리복지재단이 탄생했다. 온누리교회 아웃리치가 예수향기회를, 예수향기회가 온누리교회 긍휼사역과 복지재단의 전신이 되었다.
재난과 사고 현장에 아웃리치팀이 있었다
이태화 형제, 아웃리치에서 나온 첫 순교자
온누리교회는 아웃리치를 통해 재난 현장에서 세상과 함께 눈물 흘렸다. 온누리교회 아웃리치팀은 자연재해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도 빛을 발했다. 해마다 태풍피해를 입던 강원도에 재난구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수해민들을 위한 헌금뿐만 아니라 직접 복구 현장으로 뛰어 들었다. 태풍에 쓰러진 마을을 재건하고, 지역교회를 건축했다. 다친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치료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2004년 북한 용천 열차 폭발사고, 2005년 스리랑카 쓰나미 피해지역을 직접 방문해 희생자 가족들을 부여잡고 함께 눈물 흘렸다.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는 일회성에 그치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 발생한 대형 쓰나미 지역 피해복구 아웃리치는 무려 4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온누리교회 아웃리치 팀원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구조 활동에 탄한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이 감사하다는 서신을 보낼 정도였다.
2010년 1월에 발생한 아이티 지진피해 현장에도 어김없이 온누리교회 아웃리치팀이 있었다. 당시 아이티 지진피해 규모는 엄청났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 온누리교회는 CMN(의료선교팀) 긴급구호 아웃리치팀을 급파해 매일 3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미주비전교회는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티 아웃리치를 이어갔다.
온누리교회가 활발한 아웃리치를 벌이면서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슬픈 일도 있었다. 2004년 8월, 이태화 형제가 경남 하동 화개제일교회 아웃리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로 순교했다. 그는 온누리교회 아웃리치에서 나온 첫 번째 순교자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 이태화 형제의 순교 이후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는 더욱 활발해졌다.
표어와 주제에 숭고한 뜻 담겨 있다
올해는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주님과 함께’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행함’이다. 구호를 외치는 데서 끝나는 아웃리치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온누리교회 표어를 보면 그 숭고한 뜻이 담겨 있다.
2005년 온누리교회 표어가 ‘온 세상을 위한 교회’였다. 그해 1월, 대학청년부 아웃리치팀이 쓰나미 피해를 입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2009년 표어는 ‘열방을 향한 꿈’이었다. 그해는 다른 해에 비해 온누리교회 아웃리치 팀들이 더 열심히 열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2011년부터 3년 동안은 대륙을 미리 정하고 아웃리치에 집중했다. 2011년 블레싱 아시아, 2012년 블레싱 사하라, 2013년 블레싱 한반도가 아웃리치 주제였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미리 정한 대륙을 품고 기도하고, 그 대륙으로 집중적으로 아웃리치를 갔다. 그만큼 열매도 풍성했다.
올해는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주님과 함께’가 아웃리치 주제다. 우리가 있는 곳이 높은 곳이고, 아웃리치 가는 곳이 낮은 곳이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더 낮은 자세로 열방을 섬기겠다는 의미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세대를 막론하고,
사역팀에서 캠퍼스까지 아웃리치 간다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는 성인공동체, 대학청년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차세대, 캠퍼스, 사역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참여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온누리교회가 아니라 온난리교회”라고 평하기도 했다.
고사리 손들의 아웃리치는 감동이 더하다. 어른들보다 그 열기가 뜨겁다. 올 여름에도 36개 팀 700명이 넘는 차세대들이 아웃리치를 떠난다. 가까이 경기도 연천부터 멀리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도 광범위하다.
사역팀 아웃리치도 눈에 띤다. 예수제자학교 JDS는 하반기 개강을 앞두고 모든 수강생들이 아웃리치를 간다. 6개 반 546명의 수강생들이 15개국 42개 지역으로 파송된다.
의료선교팀 CMN 소속 7개 팀도 국내는 물론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러시아로 청진기 들고 떠난다. 서빙고와 양재를 제외한 8개 캠퍼스에서도 아웃리치팀을 꾸렸다.
해마다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온누리교회 아웃리치팀이 올해는 또 어떤 역사를 쓸지 벌써부터 귀추가 주목된다.
<칼럼>
12가정의 초창기 아웃리치
온누리교회가 세워진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상이 세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다. 나는 온누리교회 초창기 멤버였던 12가정 중의 한 사람이다.
온누리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지기 전인 1984년 10월. 한남동 횃불회관에서 우리 12가정은 하용조 목사님의 인도로 3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처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아니했든 혹독한 제자훈련을 받았다. 성경공부는 빡빡했다.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하루에 성경을 10장씩 읽고 큐티노트를 제출했다. 1주일에 책 세 권을 읽고 독후감 도 발표도 해야 했다. 과제가 상당했다. 독후감을 발표하면서 울컥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고 허영오 장로)이 눈물을 닦아주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이다.
하 목사님은 우리들에게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심어주셨다. 12가정은 성경공부와 수많은 기도모임을 통해 선교와 떠남을 배웠다. 교회 건물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주일예배를 야외에서 드리거나 아웃리치를 가서 그곳 교회를 섬기는 일이 많았다.
당시 열두 가정 중에 연세대(원주 캠퍼스) 교수였던 분이 계셨다. 12가정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토요일에 그분이 일하던 원주로 가서 잠을 자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다시 서울로 오곤 했다. 하루는 식사를 준비하던 자매(당시는 직분과 이름을 다 내려놓고 남자는 형제, 여자는 자매라고 불렀다)들에게 하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공주님입니다. 공주님들은 시원한 곳에서 쉬세요. 형제들이 머슴이 되어 식사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형제들에게 앞치마를 건넸다. 하 목사님도 손수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가셔서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부엌일하기 싫어하시던 모 장로님이 후미진 곳에서 농땡이 부리다 걸리기도 했다. 얼마나 재밌고 즐거웠는지,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어도 형도교회 아웃리치가 기억난다. 어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이다.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지듯 어도는 썰물 때면 바닷길이 나는 곳이다. 당시 형도교회 전도사님의 딸이 뭍의 학교에서 이 바닷길을 따라 귀가하던 중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아픔이 있는 곳이기에 우리는 더욱 신경을 써서 아웃리치를 준비했다.
지금도 그 날이 기억난다.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다.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유라굴로 폭풍이 떠올랐다. 유라굴로 폭풍을 맞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안심 시키셨듯이 우리는 어려움과 슬픔에 빠진 어도교회를 위해 기도로 더욱 무장했다. 어도에 도착해서 밭일을 하고, 배타고 조개잡이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어도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애썼다.
아웃리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 형도교회 전도사님이 감사하다며 직접 재배한 포도 한 상자를 선물로 주셨다. 이형기 사모님이 마침 성찬용 포도즙이 없으니 이 포도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포도즙을 만들 줄 알았던 내가 선뜻 자원했다. 형도교회에서 주신 포도 한 상자가 온누리교회 첫 성찬포도즙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30년 동안 온누리교회 성찬포도즙을 만들고 있다. ‘포도즙권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정확하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교회가 한창 부흥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전 교인(아마 150여명 정도 됐을 때)이 하 목사님 인솔 하에 이스라엘 비전트립을 떠나기도 했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며 갈릴리 호수가에서 열정을 토하시는 하 목사님의 설교는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온누리교회는 선교의 기치를 들고 세워진 교회다. 하 목사님은 늘 “사도행전적 교회는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러 계속 떠나라고 강조하셨다. 삶 자체가 선교라고 강조하셨다. 나는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들고 세상을 품는 온누리교회가 자랑스럽다. 그것이 바로 온누리교회 아웃리치다.
/류석인 권사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