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함께 가는 것이 영성이고, 신앙이다
<고통의 영성>을 읽고 필립 얀시, 폴 브랜드 저
2009년 3월, 당시 섬기던 교회 청년들과 운동을 하다가 쓸데없는 승부욕으로 다리뼈가 골절된 적이 있다. 웬만해선 잘 골절되지 않는 대퇴골 뼈가 세 조각났다. 40cm가 넘는 제법 긴 철심으로 부러진 뼈를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 다리를 고정시키고 누워서 병원생활을 했다. 나름 병원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병문안 오시는 분들이 심심하지 말라고 책을 선물해주셨다. 그 책 중에서 제목부터 기분 나쁜 책이 있었다. 한 쪽 구석에 처박아놓았던 그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고통의 영성>이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거들떠보지 않던 책을 퇴원한 후에 읽기 시작했다. 책 제목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공동체 영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다세포 생물들 안에 있는 개별 세포들은 생존하기 위해 다른 세포들과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살아있는 세포들은 상처를 입으면 소리를 지르고 생물 전체는 그 소리를 듣는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의학적 정의를 보는 것 같았는데 내가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실제로 경험하게 됐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6개월 정도 목발을 짚고 다녔다. 목발을 뗄 때쯤 쩔뚝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보내면서 방금 소개한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리를 쩔뚝거렸던 이유는 불편한 한 쪽 다리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불편한 한 쪽 다리 때문에 쩔뚝거렸던 이유는 고통 받는 한 쪽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온 몸의 감각들이 더 긴장하고, 온전한 다른 한 쪽 다리에 더 많은 힘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편한 한 쪽 다리의 고통을 온 몸이 분담하고 있었다.
‘공동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 안에 고통 받는 지체가 있다면, 부족함이 느껴지는 지체가 있다면, 발달된 신경과 감각으로 그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쩔뚝거릴지라도, 그래서 조금 늦게 간다할지라도 온 몸의 신경이 긴장해서 고통을 분담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조금 늦더라도, 조금 부족하더라도 함께 가야한다. 여기가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교회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족하고 힘들어하는 지체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분담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영성이고, 신앙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이다.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지, 무슨 직분인지가 그 사람의 위치를 이야기해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사랑과 섬김, 희생과 헌신, 영성과 신앙을 보고 평가하신다. 세상은 치열한 전쟁터다. 그래서 도태되면 버린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다르다. 세상과 완벽하게 달라야만 한다. 고통 받고 신음하는 지체가 있다면 손을 내밀어 사랑의 온기를 전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가려는 노력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참 모습이다.
고통의 영성은 예수님의 영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죄악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셨다. 당신의 사랑으로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얼마 전 공동체를 섬기게 되면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공동체 안에 이런 저런 모습의 지체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 공동체 식구 전부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지체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도 있을 것이고,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지체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성도들의 고통을 사랑으로 분담하고, 늦더라도 함께 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가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개역개정).”
/ 이찬우 목사(관악금천공동체)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