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바른 신앙을 전수하는 또 하나의 소통

 

기독교교육학자 엘리스 넬슨은 그의 책 <신앙교육의 터전>에서 “회중이 곧 신앙학교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회중 안에서 신앙이 소통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신앙은 신앙공동체에 의해서 전달되며, 그 신앙의 의미는 공동체의 회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의하거나 또한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사건과 관련하여 밝혀지며 발전된다.”라고 말한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신앙이 경험되어지고 학습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신앙은 더욱 기초가 튼튼해지고 굳건해 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일대일도 이와 같을 수 있을 것이다. 일대일은 다음세대 아이들이 신앙의 선배들과 같은 신앙공동체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신앙의 기초를 쌓고 튼튼히 하며 결국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할 수 있다.

첫째, 가정과 교회가 하나가 되어 다음세대를 향해 나아가는 차세대교육

최근 기독교교육의 흐름은 가정과 교회가 하나가 되어 다음세대를 신앙교육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가정교육 따로 교회교육 따로 신앙을 가르쳐 무언가 하나의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교회가 신앙교육의 자료를 만들어내고, 가정에서는 교회와 협력하여 자녀들을 신앙교육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큰 힘을 발휘하게끔 하려고 노력한다.

일대일의 교재를 가지고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일대일을 한다면? 잘되는 가정은 자녀의 신앙 성장이 급속도로 빨라질 것이나, 그러기에는 쉽지 않다. 일대일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한채 부모는 일대일의 과정을 학습하고, 자녀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일대일 과정을 밟으면서 가정안에서 서로 배운 내용을 나누고 기도함으로 일대일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둘째, 모든 사역은 ‘교육적’이어야 한다.

차세대 사역의 기본은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체적, 지적, 사회정서적, 영적인 면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다음세대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학습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만의 특성이다. 따라서 일대일을 하면서도 학습이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일대일도 ‘교육적’이어야 한다.

성인의 일대일은 어떤가? 성인의 일대일에서 ‘교육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에 비중을 더 많이 두고 강조한다면 마치 ‘교리교육’을 받듯 딱딱하고 쉽게 지루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의 일대일은 ‘공동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이의 연배를 뒤로하고 신앙의 선배는 말씀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또한 말씀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동반자가 보고 그 신앙공동체를 사모하고 그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하지만 다음세대 아이들에게는 ‘공동체성’ 보다는 ‘교육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말씀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말씀에 대해 고민하고, 교회의 전통과 신앙의 선배들의 축적된 신앙 고백을 학습함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말씀교육’, ‘교리교육’, ‘생활교육’, ‘신앙교육’이 일어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조명해야 한다.

물론, 일대일이 차세대 교육의 모든 양육을 대체할 수 없다.

고운 가루를 얻으려면, 여러번의 채에 걸러야 하는데 처음부터 너무 가는 채로 걸러내면 처음부터 얻어지는 것이 없다. 교육의 다양성으로 아이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어린이 일대일, 청소년 일대일을 ‘일대일’의 한 부분이라고만 생각해서 획일화(교재의 획일화, 형식의 획일화, 진행의 획일화)해서는 안되며, 교육의 전문가, 상담의 전문가, 문화의 전문가의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기독교교육 방법의 한 가지로써 ‘일대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셋째, 차이(Gap)를 줄이라. 성인의 일대일과는 달리 어린이 일대일, 청소년 일대일에는 양육자의 노하우가 중요하다. 특히 문화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어린이/청소년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대화가 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입시 전문가에게 단독 과외를 받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말씀이 먹여지지 않고, 그리고 정답만을 되뇌이는 앵무새가 되지 않도록 상호 작용을 통하여 스스로 말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이 스스로 말하게 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어떻게 먹이느냐가 어린이 청소년에게는 중요하다. 갓난 아이에게 밥을 먹일 수 없듯이, 다음세대 자녀들에게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가급적 교사의 입장으로 어린이/청소년에게 양육자로 서길 바란다. 부서 안에서 어느 정도 얼굴을 익히고, 아이들의 문화를 익히고, 행동 반경을 알아야 다가서서 말을 걸 수 있다. 일대일을 차세대의 양육 모델로 하기 위해, 일대일 양육자가 교사가 되어서 부서의 사역에 들어가 보라. 같은 찬양을 부르고, 같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며, 같이 들은 말씀을 나눌 때 그 나눔이 풍성해지고 그 열매가 알차게 될 것이다.

넷째, 서로 간의 동반성장이다. 어린이 일대일을 진행하셨던 양육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 있다.

어린이와 함께 일대일을 하는데, 그동안 성인들과 일대일하면서 한 번도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이 찾아내어 질문한다고 한다.

일상적으로 넘겼던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어린이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못해 줄 때, 말씀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도전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대일은 동반자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자를 성숙하게 한다. 그것도 차세대의 일대일은 다음 세대를 안타까운 중보 기도의 제목으로 만날 수도 있고, 희망찬 미래가 있는 기대로 만날 수도 있다. 성장시키기 위해 차세대의 일대일에 뛰어들었다가 자신의 성장으로 더 큰 선물을 받는 자리. 서로간의 동반성장으로 자신을 더 키우는 자리. 그 자리가 차세대 일대일의 자리이다.

다섯째, 온누리교회 차세대의 현주소. 온누리교회에 등록하는 새신자를 보면, 진짜 예수님을 처음 만나 등록하는 교인보다는 타교회에서 이동하는 교인들이 더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부부(차세대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 온누리교회에 정착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1.예배와 양육이 좋아서, 2.차세대를 아이들이 좋아해서’ 라고 말한다. 그만큼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싶어하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이끌고 싶어한다. 어린이/청소년 일대일을 부모님의 새신자과정 일대일과 맞물려 진행하거나 부모님이 경험한 일대일을 자녀들이 경험하게끔 유도하면 더욱 관심을 갖고 부모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점도 있다. 온누리교회 차세대의 인원은 약 8천명 정도이다. 그 중에 초등학생 이상, 학령기에 있는 ‘학생’들은 약 5천 2백명 정도된다. 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일대일을 모두 경험한다면 다음세대가 더욱 든든한 믿음의 세대, 신앙의 세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초대형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서빙고와 양재를 보면(캠퍼스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일대일을 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 성인들은 자신의 스케줄을 따라 어떤 위치에서든 시간과 장소를 맞추어 일대일을 진행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다. 출석하고 있는 교회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아이들이 주중에 일대일을 하러 이동하기도 어렵다. 먼 시간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고,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연령대도 있다. 유일하게 교회에 오는 주일도 주차와 공간 문제로 일대일의 시간인 1~2시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재 차세대의 일대일은 열정과 사명감으로 가득한 선생님들의 특별한 헌신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음세대 아이들이 신앙의 선배들과 같은 신앙공동체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신앙의 기초를 쌓고 튼튼히하며 결국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돕는 일대일은 차세대의 또 하나의 신앙의 소통점이 될 수 있다. 신앙을 경험하게 하고 바른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많은 양육자들이 배출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랑하는 양육자들이 모여, 어린이와 청소년의 일대일을 담당한다면, 양육자를 넘어 롤모델로, 멘토로 다음 세대 아이들을 ‘예수님을 바로 보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로 보살피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바로 보여주는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다.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예수 바보 행전’의 페이지를 함께 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석승호 목사

작성자  온누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