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홀 선교사님을 기억하며
특집
조선 선교 그리고 선교사 1
‘항상 있는 열매(fruit that will last)’
<로제타 선교사가 처음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다.>필자는 코로나19 광풍(狂風) 속에서 여러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로제타 홀 선교사님의 일기(영문판)였다. <로제타 홀의 일기>(Diary of Dr. Rosetta Hall, Esther Foundation, 2016년)는 총 4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손녀딸인 Mrs. Phyllis Hall King과 여러 사람들이 두 세대 동안 보관해오고 있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130여 년 전 구한말로 돌아가 로제타 홀 선교사 부부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헌신하셨던 귀한 삶을 알아가며 때로는 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이 나는 감동과 감격을 경험했다. 로제타 홀 선교사님을 기억하며 두 번에 걸쳐 그분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20살 로제타의 서원
교사에서 의료선교사로
교사에서 의료선교사로
로제타 선교사는 20세 때 챈들러라는 인도 선교사의 간증을 듣게 된다. 인도의 여성 환자들이 제대로 진료를 못 받고, 차별대우를 받는 부당함을 들으며 그녀는 어렵고 억압된 사람들을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선교사의 삶을 서원하게 된다. 당시 교사였던 로제타 선교사는 방향을 전환해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 졸업하고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해외 여성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1890년부터 5년 동안 의료선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90년 8월 21일 로제타 선교사는 뉴욕 주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랑하는 부모와 눈물의 작별을 하고 조선을 향해 떠난다. 로제타 선교사의 부모님과 여동생은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영적으로 성숙한 기도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일기에는 로제타 선교사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사랑스런 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편지들은 필자가 해외에 있을 때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언니 로제타의 사진을 하루에 두 번씩 보고 있다는 동생 애니의 편지를 보며 자매들끼리도 무척 따뜻한 관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제트 선교사는 친구이자 간호사인 Miss Lewis와 훗날 남편 윌리암 홀(William Hall)을 소개 시켜주는 Mrs Skidmore의 기도와 권고를 받으며 25세 독신의 몸으로 뉴욕 기차역을 떠난다. 이때 로제타 선교사가 붙잡은 말씀이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로제타 선교사는 선교 기간 내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신 그 태도 즉, 종의 모습을 추구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집을 떠난다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차후에도 종종 만나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천국에서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욱 그녀를 잡아준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친밀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었다. 일기에 자주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자신을 유용하게 사용하실(paths of usefulness)’이다.
뉴욕을 떠난 기차는 2주 만에 9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로제타 선교사는 ‘S. S. Oceanic’이라는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0년 10월 10일 부산에, 10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까지 한 달 10여 일이 소요된 셈이었다. 일기에서는 이 과정을 너무나 소상히 기술하고 있어서 필자는 마치 로제타 선교사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 기간 동안 로제타 선교사는 배 멀미도 하고, 함께 배를 탄 사람들과 갈등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바다 뒤에 계신 하나님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렘 3:22~23)라는 고백으로 노래하곤 했다. 고생스런 여행길로 여기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놀라운 구원사역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에 오히려 특권으로 여긴다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깊은 겸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제트 선교사는 친구이자 간호사인 Miss Lewis와 훗날 남편 윌리암 홀(William Hall)을 소개 시켜주는 Mrs Skidmore의 기도와 권고를 받으며 25세 독신의 몸으로 뉴욕 기차역을 떠난다. 이때 로제타 선교사가 붙잡은 말씀이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로제타 선교사는 선교 기간 내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신 그 태도 즉, 종의 모습을 추구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집을 떠난다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차후에도 종종 만나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천국에서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욱 그녀를 잡아준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친밀함과 신뢰하는 믿음이었다. 일기에 자주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자신을 유용하게 사용하실(paths of usefulness)’이다.
뉴욕을 떠난 기차는 2주 만에 9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로제타 선교사는 ‘S. S. Oceanic’이라는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0년 10월 10일 부산에, 10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까지 한 달 10여 일이 소요된 셈이었다. 일기에서는 이 과정을 너무나 소상히 기술하고 있어서 필자는 마치 로제타 선교사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 기간 동안 로제타 선교사는 배 멀미도 하고, 함께 배를 탄 사람들과 갈등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바다 뒤에 계신 하나님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렘 3:22~23)라는 고백으로 노래하곤 했다. 고생스런 여행길로 여기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놀라운 구원사역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에 오히려 특권으로 여긴다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깊은 겸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보구여관에서 조선 여인들을 진료하다
보구여관에서 조선 여인들을 진료하다
로제타 선교사는 서울에 도착한 그 다음날인 1890년 10월 15일 미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에서 설립해준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심한 남존여비 사회였다. 여성들은 많은 경우 이름이 없거나 어느 동네 출신 혹은 누구(아이)의 어머니로 통했다. 더 나아가 여자 환자들은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여주지 못하는 억압된 관습사회였다. 이 상황에서 로제타 선교사는 이화학당에서 데려온 김점동이라는 한국 여성을 의료 조수로 선발하였다. 김점동은 후에 박유산과 결혼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에스더 박’이 된다.
로제타 선교사가 한국에서 진료 첫 날 묵상했던 말씀이 요한복음 15장 5절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 말씀은 그녀의 사역의 원동력이자, 삶의 목표가 되는 말씀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 말씀처럼 예수님과 친밀하고 긴밀한 교제 안에 머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때 환자들이 질환에서 치유될 뿐 아니라 그들이 구원 받는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열매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명성과는 다르게 오래가는 ‘항상 있는 열매(fruit that will last; 요 15:16)’임을 깨닫게 되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서 많은 일들을 했지만 늘 관계 중심이었다. 뉴욕에서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우이자 간호사인 Lewis를 한국에 데려오는 과정에 이화학당의 교사이자 통역관이던 Miss Rothweiler와 갈등이 있었고, 심지어 그녀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그녀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 결과 서로 화해가 이뤄졌고, 나중에는 함께 일하는 데서 오는 시너지도 경험한다.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애니, Miss Bengel, 김점동, 친우이자 간호사 Miss Lewis, 5명의 학생들(오와가, 애니, 봉순, 수잔, 메리 등 my girls), 학생 봉순의 어머니인 사라, 한국 최초 여선생인 이경숙(Priscilla)과도 따뜻한 지지의 관계를 유지하는 등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로제타 선교사는 보구여관에서 손가락이 붙은 환자, 화상 환자, 염증괴사, 성병 환자 등을 포함해서 무수한 환자들을 돌봤다. 이밖에도 왕진 가방을 들고 가정을 방문해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하루는 로제타 선교사가 심하게 화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녀는 환자 가족들에게 피부 절편(切片)을 공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부모가 주신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관습으로 인해 피부 절편을 공여 받지 못하게 된다. 이때 로제타 선교사는 자신의 팔등과 여러 부위에서 피부를 벗겨서 심하게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수차례 공여했다. 면역학적으로 일치하지 않기에 그 피부 절편이 성공적으로 또 영구적으로 환자의 화상 부위에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가 화상으로 인해 벗겨진 부위에 박테리아 등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또 화상 부위를 통한 체액 손실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제타 선교사의 선하고 용기 있는 실천에 힘입어 화상 환자는 상태가 좋아지고, 큰 부작용에서 회복되었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이 그녀를 더욱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그녀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헌신과 사랑의 희생을 환자와 그 가족에게 소개할 때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매일 아침 기도모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부인네들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열심히 살았다. 비는 시간에는 한글공부를 했다. 또한 그녀는 정동 보구여관의 환자를 돌보며 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였다. 히브리서 13장 21절 말씀 묵상하며 “나는 주님에 속한 인생이며 그분의 손에 잡혀있습니다. 나는 주인인 그분의 손에 잡혀있습니다. 나는 주인인 그분께 순종할 때 그분은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곤 했다. 또한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라는 말씀을 의지하며 자신과 조선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늘 신뢰했다.
/ 성주명 장로(여의도공동체, 이화의료원 내과교수)
로제타 선교사가 한국에서 진료 첫 날 묵상했던 말씀이 요한복음 15장 5절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 말씀은 그녀의 사역의 원동력이자, 삶의 목표가 되는 말씀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 말씀처럼 예수님과 친밀하고 긴밀한 교제 안에 머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때 환자들이 질환에서 치유될 뿐 아니라 그들이 구원 받는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열매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명성과는 다르게 오래가는 ‘항상 있는 열매(fruit that will last; 요 15:16)’임을 깨닫게 되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서 많은 일들을 했지만 늘 관계 중심이었다. 뉴욕에서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우이자 간호사인 Lewis를 한국에 데려오는 과정에 이화학당의 교사이자 통역관이던 Miss Rothweiler와 갈등이 있었고, 심지어 그녀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그녀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 결과 서로 화해가 이뤄졌고, 나중에는 함께 일하는 데서 오는 시너지도 경험한다.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애니, Miss Bengel, 김점동, 친우이자 간호사 Miss Lewis, 5명의 학생들(오와가, 애니, 봉순, 수잔, 메리 등 my girls), 학생 봉순의 어머니인 사라, 한국 최초 여선생인 이경숙(Priscilla)과도 따뜻한 지지의 관계를 유지하는 등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로제타 선교사는 보구여관에서 손가락이 붙은 환자, 화상 환자, 염증괴사, 성병 환자 등을 포함해서 무수한 환자들을 돌봤다. 이밖에도 왕진 가방을 들고 가정을 방문해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하루는 로제타 선교사가 심하게 화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녀는 환자 가족들에게 피부 절편(切片)을 공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부모가 주신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관습으로 인해 피부 절편을 공여 받지 못하게 된다. 이때 로제타 선교사는 자신의 팔등과 여러 부위에서 피부를 벗겨서 심하게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수차례 공여했다. 면역학적으로 일치하지 않기에 그 피부 절편이 성공적으로 또 영구적으로 환자의 화상 부위에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가 화상으로 인해 벗겨진 부위에 박테리아 등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또 화상 부위를 통한 체액 손실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제타 선교사의 선하고 용기 있는 실천에 힘입어 화상 환자는 상태가 좋아지고, 큰 부작용에서 회복되었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이 그녀를 더욱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그녀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헌신과 사랑의 희생을 환자와 그 가족에게 소개할 때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매일 아침 기도모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부인네들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열심히 살았다. 비는 시간에는 한글공부를 했다. 또한 그녀는 정동 보구여관의 환자를 돌보며 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였다. 히브리서 13장 21절 말씀 묵상하며 “나는 주님에 속한 인생이며 그분의 손에 잡혀있습니다. 나는 주인인 그분의 손에 잡혀있습니다. 나는 주인인 그분께 순종할 때 그분은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곤 했다. 또한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라는 말씀을 의지하며 자신과 조선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늘 신뢰했다.
/ 성주명 장로(여의도공동체, 이화의료원 내과교수)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헌신과 사랑의 희생을
로제타 선교사가 조선의 환자와 그 가족에게 소개할 때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