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윌리엄 홀 선교사 가족의 눈물겨운 조선 사랑
조선 선교 그리고 선교사 2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27세 때인 1892년 6월 27일 의사이자 선교사인 윌리엄 홀(William Hall)과 결혼한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1893년 3월 14일 동대문에 ‘볼드윈 진료소(Baldwin Dispensary)’를 열었고, 이는 1912년 ‘Lillian Larris Memorial 병원’으로 통합되어 거듭나게 된다. 로제타 선교사는 정동에 위치한 보구여관과 볼드윈 진료소를 오가며 환자들을 돌보게 된다. 그녀는 그때의 경험을 1914년에 쓴 글 <조선에서의 의료 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근무한 정동에 위치한 보구여관에서 두 사람이 나르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약 3마일의 거리였고 약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이 과정에 가마를 나르는 남정네들은 최소 2번 정도는 쉬어가며 나를 이동시켰다. 이때 나는 지저분한 진흙탕과 벌거벗은 아이들로 인해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마치 뉴욕에서 가마를 타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듯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의 지독한 냄새가 뉴욕에 있는 나를 꿈에서 깨우게 했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원래 중국선교를 계획했으나 결혼 이후 북한선교에 온힘을 다하게 된다. 그는 평양에서 진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창식이다. 김창식은 훗날 조선 최초의 감리교 목사가 되는 인물이다. 윌리엄 홀 선교사 가까이에서 사역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 전파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평양관원과 도지사로부터 여러 차례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관원들은 윌리엄 홀 선교사 앞에서 자주 김창식을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폭행하기도 했고, 단두대에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윌리엄 홀 선교사가 평양을 떠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윌리엄 홀 선교사는 굴하지 않고 박해를 참아내며 의료와 말씀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상황을 로제타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마치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복음으로 인해 투옥되었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 문이 열리고 지속적으로 복음전파 사역을 한 것이 연계가 되었다.”
1894년 5월의 일기는 로제타 홀 선교사 부부가 평양에서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쉴 새 없이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몰려온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오후에 홀 부부가 낳은 6개월 된 아들 셔우드가 신기하게 생겼다며 평양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구경꾼들이 마당을 꽉 채우자 로제타 선교사는 그들을 10명씩 그룹으로 5분씩 수 시간 동안 자신의 아들 셔우드를 구경하게 했다. 아기를 보여주기 위해 안방도 보여줘야 했다. 개인적인 미국 문화에서 잘 모르는 제 삼자에게 연약한 아기와 침실까지 보여준다는 것은 실상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셔우드가 넘어져서 치아가 두 개나 부러진 다음 날에도 평양의 구경꾼들이 원하면 아기와 안방까지 보여주었다. 복음을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894년 6월 27일 결혼 2주기 때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의 하루가 남편 없는 1000일보다 낫다”며 더 좋은 날들이 미래에 올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훗날 다가올 혼인 50주년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 선교사는 1894년 7월과 8월 너무 무리하게 평양에서 사역에 매진하다가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 고열과 탈수, 영양부족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서울로 이송되었으나 아들 셔우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로제타 선교사 품 안에서 소천하고 만다. 1894년 11월 27일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로제타 선교사의 일기 4권은 여기서 급작스럽게 끝이 난다.
“내가 근무한 정동에 위치한 보구여관에서 두 사람이 나르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약 3마일의 거리였고 약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이 과정에 가마를 나르는 남정네들은 최소 2번 정도는 쉬어가며 나를 이동시켰다. 이때 나는 지저분한 진흙탕과 벌거벗은 아이들로 인해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마치 뉴욕에서 가마를 타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듯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의 지독한 냄새가 뉴욕에 있는 나를 꿈에서 깨우게 했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원래 중국선교를 계획했으나 결혼 이후 북한선교에 온힘을 다하게 된다. 그는 평양에서 진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창식이다. 김창식은 훗날 조선 최초의 감리교 목사가 되는 인물이다. 윌리엄 홀 선교사 가까이에서 사역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 전파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평양관원과 도지사로부터 여러 차례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관원들은 윌리엄 홀 선교사 앞에서 자주 김창식을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폭행하기도 했고, 단두대에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윌리엄 홀 선교사가 평양을 떠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윌리엄 홀 선교사는 굴하지 않고 박해를 참아내며 의료와 말씀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상황을 로제타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마치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복음으로 인해 투옥되었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 문이 열리고 지속적으로 복음전파 사역을 한 것이 연계가 되었다.”
1894년 5월의 일기는 로제타 홀 선교사 부부가 평양에서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쉴 새 없이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몰려온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오후에 홀 부부가 낳은 6개월 된 아들 셔우드가 신기하게 생겼다며 평양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구경꾼들이 마당을 꽉 채우자 로제타 선교사는 그들을 10명씩 그룹으로 5분씩 수 시간 동안 자신의 아들 셔우드를 구경하게 했다. 아기를 보여주기 위해 안방도 보여줘야 했다. 개인적인 미국 문화에서 잘 모르는 제 삼자에게 연약한 아기와 침실까지 보여준다는 것은 실상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셔우드가 넘어져서 치아가 두 개나 부러진 다음 날에도 평양의 구경꾼들이 원하면 아기와 안방까지 보여주었다. 복음을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894년 6월 27일 결혼 2주기 때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의 하루가 남편 없는 1000일보다 낫다”며 더 좋은 날들이 미래에 올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훗날 다가올 혼인 50주년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 선교사는 1894년 7월과 8월 너무 무리하게 평양에서 사역에 매진하다가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 고열과 탈수, 영양부족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서울로 이송되었으나 아들 셔우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로제타 선교사 품 안에서 소천하고 만다. 1894년 11월 27일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로제타 선교사의 일기 4권은 여기서 급작스럽게 끝이 난다.
그녀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1894년 12월 조선을 떠난다. 셔우드와 뱃속에 있는 마가렛을 데리고 김점동, 박유산 부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1895년 1월 도착해서 딸을 낳는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로제타 선교사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평양 기홀병원(Hall Memorial Hospital) 설립 기반을 닦는다. 로제타 선교사는 3년 만인 1897년 11월 다시 조선에 돌아오고, 한국 맹인들을 위한 최초의 점자책을 만든다. 그런데 그때 사랑하는 딸 마가렛이 장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로제타 선교사의 슬픔은 남편을 잃은 슬픔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아빠가 너무 딸을 그리워하여 데려갔다”고 기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후학양성에 대한 로제타 선교사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과 평양의 의학강습소와 East Woman’s 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설립한다. 기홀병원(1897년), 광혜여원(1898년), 맹학교(1900년, 한글 점자 교과서 발행), 농학교(1910년), 동대문병원(1921년),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1928년) 등 많은 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을 통한 한국 근대 의료의 기반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그 결과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와 한국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그 의료와 의학 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25년 그녀의 아들 셔우드가 의사가 되어 어머니가 사역하는 한국에 오게 되었다. 1932년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우표를 발행하기도 한다. 1928년 서울의 의학강습소가 경성여자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제타 선교사는 68세에 43년 동안 조선에서의 그 많은 사역을 뒤로 하고 선교사의 삶을 마무리 짓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85세에 소천한다. 로제타 선교사의 유해가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남편과 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후학양성에 대한 로제타 선교사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과 평양의 의학강습소와 East Woman’s 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설립한다. 기홀병원(1897년), 광혜여원(1898년), 맹학교(1900년, 한글 점자 교과서 발행), 농학교(1910년), 동대문병원(1921년),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1928년) 등 많은 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을 통한 한국 근대 의료의 기반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그 결과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와 한국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그 의료와 의학 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25년 그녀의 아들 셔우드가 의사가 되어 어머니가 사역하는 한국에 오게 되었다. 1932년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우표를 발행하기도 한다. 1928년 서울의 의학강습소가 경성여자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제타 선교사는 68세에 43년 동안 조선에서의 그 많은 사역을 뒤로 하고 선교사의 삶을 마무리 짓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85세에 소천한다. 로제타 선교사의 유해가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남편과 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필자는 1997년부터 이화의료원에 근무하면서 어느 정도 로제타 선교사에 대해 파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개월 <로제타 홀의 일기> 영어판 4권을 꼼꼼히 읽으면서 무엇이 로제타 선교사를 여러 면에서 어둡고, 열악했던 조선에 오도록 했는지 그 궁금함을 풀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사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병든 자, 포로 된 자,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눈먼 자들을 군림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던 예수님 때문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뉴욕에서 여의사로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근대식 병원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었건만 구한말 악취가 나는 정동과 동대문 길을 불편한 가마를 타고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다. 사랑하는 남편을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고 딸도 불과 3살 때 장염으로 죽었건만, 조선과 조선인 특히 여성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자신의 일평생을 바치는 사랑의 희생과 순종을 했다.
필자는 2004년 이후 이화의료원의 여러 동료들과 힘을 합해 ‘EMC(Ewha Medical Care)’라는 이름으로 이화여대 학생들과 의과대학생, 교수, 약사, 간호사, 직원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지로 해외의료선교를 다녀오곤 했다. 모든 것이 열악했던 구한말 43년 동안 헌신했던 로제타 선교사의 희생과 헌신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EMC 의료선교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감격과 더불어 삶의 목표를 재정비하고 의미를 되찾았다. 나는 그들이 로제타 선교사 부부의 후예들로서, 로제타 선교사에게 빚진 자로서 열악한 제3세계에 희망과 소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 믿는다.
로제타 선교사가 직접 우리에게 하실 법한 말씀으로 끝맺으려고 한다.
“다들 안녕하시죠? 저는 로제타 홀입니다. 1894년 먼저 떠났던 남편 곁으로 1951년 4월 5일 합류해서 천국에 잘 있습니다. 3살 때 왔던 딸과 한국에서 폐결핵 사업을 활발히 했던 아들 부부도 와 있네요. 제가 85세의 나이로 양화진에 묻히기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삶에 대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삶은 주님을 깊이 알아가고, 좋으신 주님을 알리고, 증거하는 것이라 정리하고 싶네요. 동시에 삶이란 예수님이 길과 목표, 진리가 되며, 그분이 우리의 생명임을 깨닫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살면서 결국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지구에 살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역에서 여러 일들을 하지만 ‘항상 있는 열매(fruit that will last)’는 일 자체보다는 관계에서 옵니다. 주님이 섬기셨던 태도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변과 친구들을 대하고, 실의에 빠지거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지지해주고 돕는 일입니다.
삶이 실망도 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겪고, 좌절도 찾아오겠으나 여러분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마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천국에 들어오실 때 주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지구에서 살 때 힘을 내십시오. 참 포도나무이시고,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합니다.”
/ 성주명 장로(여의도공동체, 이화의료원 내과교수)
필자는 2004년 이후 이화의료원의 여러 동료들과 힘을 합해 ‘EMC(Ewha Medical Care)’라는 이름으로 이화여대 학생들과 의과대학생, 교수, 약사, 간호사, 직원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지로 해외의료선교를 다녀오곤 했다. 모든 것이 열악했던 구한말 43년 동안 헌신했던 로제타 선교사의 희생과 헌신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EMC 의료선교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감격과 더불어 삶의 목표를 재정비하고 의미를 되찾았다. 나는 그들이 로제타 선교사 부부의 후예들로서, 로제타 선교사에게 빚진 자로서 열악한 제3세계에 희망과 소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 믿는다.
로제타 선교사가 직접 우리에게 하실 법한 말씀으로 끝맺으려고 한다.
“다들 안녕하시죠? 저는 로제타 홀입니다. 1894년 먼저 떠났던 남편 곁으로 1951년 4월 5일 합류해서 천국에 잘 있습니다. 3살 때 왔던 딸과 한국에서 폐결핵 사업을 활발히 했던 아들 부부도 와 있네요. 제가 85세의 나이로 양화진에 묻히기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삶에 대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삶은 주님을 깊이 알아가고, 좋으신 주님을 알리고, 증거하는 것이라 정리하고 싶네요. 동시에 삶이란 예수님이 길과 목표, 진리가 되며, 그분이 우리의 생명임을 깨닫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살면서 결국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지구에 살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역에서 여러 일들을 하지만 ‘항상 있는 열매(fruit that will last)’는 일 자체보다는 관계에서 옵니다. 주님이 섬기셨던 태도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변과 친구들을 대하고, 실의에 빠지거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지지해주고 돕는 일입니다.
삶이 실망도 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겪고, 좌절도 찾아오겠으나 여러분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마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천국에 들어오실 때 주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지구에서 살 때 힘을 내십시오. 참 포도나무이시고,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합니다.”
/ 성주명 장로(여의도공동체, 이화의료원 내과교수)
<발문>
“믿음의 경주를 잘 마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참 포도나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합니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