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해설] “여호와께서는 질투가 많으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나 1:2).
맛있는 말씀해설
“여호와께서는 질투가 많으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나 1:2).
<나훔>은 앗수르 수도인 니느웨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예언서다. <나훔> 1장 2절에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세 가지 논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셨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감정’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낌’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이해하기 힘든 억울한 일을 경험하면 속상하거나 화가 난다. 하나님도 세상의 여러 사건에 기쁨, 분노, 슬픔 등을 느끼는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정은 인간의 감정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이를 무감동성(impossibility)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의인화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이해하도록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 6장의 노아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도 신인동형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감정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둘째,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구약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주로 이방신과 관련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방신들을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시고, 그들을 질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질투는 부부간의 사랑과 같은 하나님의 열정을 의미한다. 죄를 지어 더는 사랑받을 자격 없는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사랑의 언약을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고, 한결같은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당한 상처와 아픔에 대한 보복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는데,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반드시 공의롭게 만드시겠다는 공의를 드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인 동시에 약자인 사랑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의 언약으로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셋째,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굳이 질투와 분노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질투와 분노가 기독교인들이 품지 말아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분노와 질투 역시 인간이 느끼도록 주신 감정이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자기중심적으로 길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에 익숙해져서 정작 음식 재료 맛을 전혀 못 느끼듯이 말이다. 자기중심으로 길들은 기쁨은 세상 즐거움을 경험할 때만 반응하도록 왜곡되어 버렸다. 참 기쁨이신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마 11:17). 질투와 분노 역시 이기적인 감정으로 여겨져 기독교인들이 품지 말아야 할 감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감정을 느낀다면 분노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강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하나님 중심의 감정을 온전히 회복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때 성경이 이전과는 또 다르게 더 깊은 차원으로 이해될 것이다.
/ 최용준 목사(강남B공동체)
첫째,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셨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감정’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낌’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이해하기 힘든 억울한 일을 경험하면 속상하거나 화가 난다. 하나님도 세상의 여러 사건에 기쁨, 분노, 슬픔 등을 느끼는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정은 인간의 감정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이를 무감동성(impossibility)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의인화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이해하도록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 6장의 노아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도 신인동형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감정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둘째,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구약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주로 이방신과 관련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방신들을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시고, 그들을 질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질투는 부부간의 사랑과 같은 하나님의 열정을 의미한다. 죄를 지어 더는 사랑받을 자격 없는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사랑의 언약을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고, 한결같은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당한 상처와 아픔에 대한 보복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는데,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반드시 공의롭게 만드시겠다는 공의를 드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인 동시에 약자인 사랑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의 언약으로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셋째,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굳이 질투와 분노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질투와 분노가 기독교인들이 품지 말아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분노와 질투 역시 인간이 느끼도록 주신 감정이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자기중심적으로 길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에 익숙해져서 정작 음식 재료 맛을 전혀 못 느끼듯이 말이다. 자기중심으로 길들은 기쁨은 세상 즐거움을 경험할 때만 반응하도록 왜곡되어 버렸다. 참 기쁨이신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마 11:17). 질투와 분노 역시 이기적인 감정으로 여겨져 기독교인들이 품지 말아야 할 감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감정을 느낀다면 분노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강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하나님 중심의 감정을 온전히 회복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때 성경이 이전과는 또 다르게 더 깊은 차원으로 이해될 것이다.
/ 최용준 목사(강남B공동체)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