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비전집회 메시지_연약한 교회, 위험한 교회, 낮아진 교회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되는 ‘예수 바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온누리교회에 하나님이 새로 주신 비전은 ‘예수바보행전’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보살피고, 세상에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바보행전이다.
어떻게 하면 온누리교회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되는 ‘예수 바보’가 될 수 있을까. 10월 6일부터 8일까지 이어진 부흥비전집회에 그 해답이 있다. 부흥비전집회 이재훈 담임목사의 설교를 요약했다.
/ 편집자 주
하나님은 위대한 모험가입니다. 성경은 모험의 책입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그 모험의 절정은 인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모험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배신할 수도 있는 존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존재를 창조하셨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 모험의 이유입니다. 그 사랑이 모험을 가능하게 한 동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모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험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했고,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다니엘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너무나 위험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도, 사도 바울도 매우 위험한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위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위험 때문에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님께 진짜 순종하면 매우 위험한 길을 가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 세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쓰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위험보다는 안전, 담대함보다는 조심스러움, 사명보다는 스스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은 바벨론 포로시대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개신교가 핍박받는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를 비롯해서 성경적 가치관을 실현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험한 교회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교회를 보십시오. 중국 교회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중국교회가 부흥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핍박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직도 없고, 제도화 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법이 뭔지도 모릅니다.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고난을 통해서 세워지고, 고난을 통해서 순수해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진짜 위기입니다. 우리가 위험한 교회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거룩한 절박함과 선교적 사명감
어떤 교회가 위험한 교회입니까. 첫째, 거룩한 절박함이 있는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거룩한 절박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중풍병자를 네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매고 왔습니다. 사람이 꽉 차서 예수님이 계신 집에 들어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을 뚫었습니다. 절박했기 때문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오늘날 교회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어떻게 구원해야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붕을 뚫는 교회가 바로 위험한 교회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게 하려면 지붕을 뚫는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지불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험한 교회입니다.
둘째, 위험한 교회는 선교적 사명감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좋은 교회는 될 수 있어도 위험한 교회는 아닙니다. 선교적 사명이 없으면 어쩌면 율법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이고, 도피주의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선교적 사명감이 없으면 교회다워지지 못합니다. 공동체가 선교적 사명으로 하나 된다면 진정한 나눔이 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연약함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선교가 교제, 공동체, 예배, 사역을 이끌어가는 교회가 바로 위험한 교회입니다.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코미니타스’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코미니타스는 더 강렬한 사명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community(공동체)가 아니라 코미니타스가 되어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코미니타스를 경험하는 사례는 단기선교와 아웃리치입니다. 단기선교와 아웃리치를 다녀오면 다들 영적전사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안락하고, 자유롭고, 편안한 환경에서는 겪어볼 수 없는 일들이 코미니타스를 경험하게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사명으로 불타오르는 코미니타스, 위험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험한 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안전해 보이는 길,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셨습니다. 위험해 보이는 길이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리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안전한 길은 가장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위험한 교회 는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죽는 것이 유익한 것을 믿습니까. 이런 각오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영적인 모험입니다. 모험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안전하고 안일한 삶에 집착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회개해야합니다.
교회의 출발은 예수님의 성육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으로 생긴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출발은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의 낮아지심이 없었다면 교회는 생기기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원리는 예수님의 겸손이요, 낮아지심입니다.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의 DNA에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만물을 어떻게 구속하시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성육신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역사도 알게 되고, 우리의 존재도 알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은 한번 이루어졌지만 영원히 지속됩니다. 하나님이 잠시 사람이 되셨다가 다시 하나님으로 되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몸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육신을 입은 몸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성육신적인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네 종류로 변화되었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증인이 되는 ‘missionary church’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선교사로 쓰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다양한 사역을 하는 ‘ministry church’입니다. ministry church는 많은 활동을 합니다. 사회 속에서 제도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셋째, 유지하기에 급급한 ‘maintainer church’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과 시대적 책임 보다 자신의 문제와 교제에 몰두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머지않아 네 번째 교회가 됩니다. 네 번째 교회는 박물관 같은 교회(museum church)입니다. 교회가 어느 순간 사람들이 알아서 오기를 기다립니다. 교회의 권위와 좋은 교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이 여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와 멀어져버린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성육신적인 교회는 결코 박물관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증인되는 교회가 바로 성육신적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깊숙한 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속에 찾아오신 교회가 바로 성육신적인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성육신한 교회입니다. 세상을 탈피하고, 세상을 외면하고, 세상의 문화를 등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 세상 한복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 침투해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위하여, 예수님처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육신적인 교회, 낮아진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을 바라보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교회, ‘on to christ’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앞에 모시고, 바라보며,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합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봐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성육신적인 교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낮아진 교회 성도들은 지극히 작고 연약한 자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지체들을 자기와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헐벗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연약하고, 감옥에 갇힌 지체들에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만나는 연약한 지체들을 주를 대하듯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on to christ’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위하여(for christ)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웃을 보살펴야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소원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성장은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적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실수와 잘못은 고난이 아닙니다. 복음이 증거 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같이(like christ)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 세상에 예수님을 바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성육신적인 교회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녀, 예수님 같이 살아가는 자녀가 되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like christ’의 종점입니다.
연약한 교회가 쓰임 받는 교회
연약한 교회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역설적 진리로 교회를 설명한 것입니다. 연약한 교회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쓰시는 강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강한 교회가 되면 무너지고, 깨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비의 공동체입니다. 사회는 지도자가 아프고, 연약하면 무너지지만 교회는 반대입니다. 성공을 거듭한 사람은 성공에 도취되어서 늘 자신만만합니다. 실패를 거듭한 사람은 실패의 상처 때문에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자들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약할 때 주안에서 더욱 강하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이 많아지고, 헌금 액수가 높아지면 목회자가 교만해지고,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온누리교회의 능력은 많은 성도들이 모였기 때문에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한순간에 믿음이 깨지고, 감정이 깨지고, 사랑도 깨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많은 수의 군중이 나의 믿음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연역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만 진짜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도망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강자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회적인 힘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힘도 아닙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못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회가 정말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에 못 박혀야합니다. 연약한 교회는 예수님처럼 연약하게 못 박히는 교회입니다.
연약한 교회는 역경이 장점으로,
깨어짐이 아름다움으로, 위기가 기회로,
연약한 교회는 역경이 변해 장점이 됩니다. ‘adversity’가 변해 ‘advantage’가 되는 것입니다. 역경이 우리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역경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장점이 됩니다.
또 깨어짐이 변해 아름다움이 됩니다. ‘brokenness’가 ‘beauty’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어짐이 아름다움이 됩니다. 선천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겸손한 사람은 비전이나 야망이 없거나 겁이 매우 많은 사람입니다. 겸손은 깨어짐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모욕을 겪으면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깨지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한 번도 상처 받아본 적 없고, 깨어진 적 없고, 고난 속에서 마음이 무너져 본 적 없는 사람은 아름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깨뜨리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꿈을 깨뜨리고, 인생을 무너뜨려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패배자로 항복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승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로 엎드리는 것이 승리자와 더 아름다운 정복자가 되는 길입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crisis’가 ‘chance’가 됩니다. ‘chaos’가 ‘creativity’가 됩니다. 인생의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우리를 더 귀한 일에 사용하시려고 변화시키는 기회입니다. 모든 종류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위기에 처할지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볼 때 그 위기가 기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창조적인 역사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택하셔서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될 메뉴가 여기 있습니다. 인생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바보가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스스로 강한 자가 되어서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쓰임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스스로 존귀한 자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천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취하여 부끄럽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천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선택 받아 쓰임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랑치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갈 길이 정해져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바보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연약합니다. 우리는 비참합니다. 멸시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연약함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자랑하거나 잘난 척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어떻게 하면 연약한 교회가 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숙제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스스로 강한 교회가 되는 순간 하나님이 온누리교회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더 깊은 헌신과 열심이 있지만 자랑하지 않는 것이 연약한 교회입니다. 물에 녹아버린 소금처럼 촉매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지극히 연약한 교회는 소금처럼 녹아 없어지지만 변화를 일으키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품어야할 교회의 비전입니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