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국내캠퍼스

20점짜리에서 80점짜리 아빠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최성완 장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아들에게”

 

최성완 장로(이수 공동체)가 활짝 웃고 있다.

 

최성완 장로(이수공동체)는 누구보다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공감능력을 가졌다. 그는 주한미국대사관 공보과에서 28년 째 일하고 있고, 아버지학교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학교에서 선정한 ‘긍정적인 아버지 역할을 하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어아버지학교’가 개설된 이후에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로 달려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친화력과 경청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최성완 장로를 만났다.
/ 김미림 기자 mirim@onnuri.org
최성완 장로는 청렴결백한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품이 곧았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분이셨다. 자녀들에게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제 아버지는 예수님 같은 분이셨어요. 지적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셨어요. 항상 웃으시면서 격려해주셨죠.”
최성완 장로는 4남매 중 막내이다. 안 그래도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내리사랑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이 받고 자랐다. 대구가 고향인 최 장로는 친구들과 관계도 원만했고, 공부도 잘했다. 의사인 형과 약사인 누나를 따라 의학을 공부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의과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의과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원하는 공부가 아니어서 그런지 대학생활이 좀처럼 흥미롭지 않았다. 전공과 적성이 맞지 않아 방황을 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군대를 갔다.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하심

 

그는 1979년 여름, 대구에 있는 공군부대 가톨릭 군종병으로 입대했다. 군종병이었지만 신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녀본 적 말고는 교회에 가 본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무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불교신자였다. 그에게 신앙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그가 군종병으로 섬기면서 조금씩 신앙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성당과 교회가 같은 장소를 사용하는 곳에서 근무했다. 주일 아침이면 기독교 예배를 준비했고, 오후에는 가톨릭의 미사를 준비했다. 그의 성실한 모습을 지켜본 신부님이 신학교에 입학해 신부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그가 아버지께 신부님의 제안을 털어놨다. 아들의 이야기를 한참동안 듣던 아버지가 조언하셨다.
“아들아, 신부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일이지만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 같구나. 고독하고 먼 길을 갈 수 있겠니?”
최 장로는 다시 진로를 고민했다. 그는 군종병으로 근무하면서 신부님이 한국인 조종사, 정비사 자녀들과 함께하는 성경공부의 통역도 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동아리에서 활동한 덕분에 영어회화 실력이 빼어났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신부님이 심리학을 전공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또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들아, 심리학은 하나의 순수문학이란다. 그런데 너의 성향과 비전을 고려한다면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다시 고민해보는 것이 좋겠구나.”
아버지는 아들 스스로 답을 찾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세계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이 나를 태어나게 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너무 작은데 더 넓은 세계로 가자. 그곳이라면 내가 할 일이 많지 않을까?”
그때 떠오른 학문이 언론학이다. 언론학을 전공해 세계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즈음 근무하던 부대에서 미군과 국군이 합동 군사작전 훈련을 했다. 그 때 미국에서 군종목사도 함께 왔다. 그 군종 목사가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유학을 제안했다. 그 군종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 서부 네바다주(州)에 위치한 네바다대학교(University of Nevada-Reno)에 입학했다.
그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에서 공부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할 즈음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언론학 전공자를 뽑고 있는데 신청을 해보라는 권유였다. 가난한 유학생이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응시했는데 그 일이 희망이 되었다. 합격통보를 받은 것. 이듬해 한국으로 건너와 1989년부터 주한미국대사관공보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신문과 뉴스를 통해 미국 정책과 관련된 보도가 있는지를 모니터링 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정확한 소통을 담당하는 일도 주된 업무다. 돌이켜 보면 하나부터 끝까지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의과대학 낙방, 아버지와의 대화, 진로 고민, 새로운 꿈, 군종 목사와의 만남, 언론학 공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아니었다면 설명할 수 없다.

 

아들과 함께 아버지학교를 섬기며

 

최성완 장로는 신우회 활동에도 열심이다. 신우회 활동을 하면서 신앙이 더 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99년 온누리교회에 왔다. 미국 출장을 다녀왔는데 아내가 아버지학교에 참가신청을 해 둔 일이 계기가 되었다.
“제자 아버지학교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좋은 아버지라 자부했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학교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버지가 가정에서 순기능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데 아버지학교만한 것이 없더군요.”
최성완 장로는 아버지로서 80점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학교에 참가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고작 20점밖에 안 되는 아버지라는 것을 실감했다. 좋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영향으로 상처 없이 자랐지만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정작 자신은 자녀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아들과 함께 인도에서 열린 ‘영어 아버지학교’에 참석했다. 그는 강사로, 아들은 스태프로 참석했다. 그 이후에도 아들과 함께 아버지학교를 섬겼다. 지금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20점짜리아빠에서 진짜 80점짜리 아빠가 됐다. 이후 가정과 교회에서 그의 멋진 활약이 기대된다. 현재 그는 이수공동체 대표 장로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같은 공동체인 우상근 장로(이수 공동체)는 “최 장로님이 공동체를 섬기면서 3040대 젊은 리더십이 중심이 되어 열기가 더해지고 있다”며 “앞으로 이수공동체 지체들이나 리더십들에게 본이 되는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아들이 보낸 편지

 

존경하는 아버지께

 

안녕하세요. 평소에 쑥스러워 아버지께 편지를 잘 쓰지 않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이해 아버지와 어머니께 편지를 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버지, 저를 믿고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늘 “우리 아들은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믿음을 심어주신 덕분에 자신감이 생겨서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단단한 믿음의 뿌리 덕분에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항상 응원과 기도로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타지에서 생활해보니, 아버지의 존재가 더 커 보입니다. 저도 장차 한 가정을 꾸리고 나갈 남자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는 이 나이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책임감으로 이끌어 나가시는 아버지를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타지에서 생활하는데 방해 될 것 같아 일부러 연락도 자주 안하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제가 더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들에게 지속적으로 흘려주신 믿음과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보답하겠습니다. 아빠,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 아들 최의석 올림

아들, 최의석

작성자  김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