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해외캠퍼스

해외비전교회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새로 세워진 해외비전교회 담당목사들을 만났다. 해외에서 Acts29비전을 쓰기 시작한 감회가 궁금해서다. 노스시카고 윤길중 목사, 밴쿠버 이한규 목사, 단동 김대진 목사, 청도 최승구 목사, 야치요 니시야마 신이치 목사, 호치민 박영근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샌디에이고 금경연 목사, 우에다 유성근 목사는 목회일정 관계로 만나지 못했다.

 
 

노스시카고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포근함 ‘윤길중 목사’

윤길중 목사윤길중 목사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대학교 동계수련회 때였어요. 3박4일 동안 울면서 회개하고 은혜 받았지요. 누나와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 가족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대학원 1학기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청년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그때 하용조 목사님이 선교사로 부르시는 시간이 있었어요. 헌신해서 2천선교 파송 선교사 1기로 중국에 가게 되었어요. 그때 아내를 만났고 7살 된 아들과 살고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 전에 교육담당 목사님의 권유로 유년부 전도사로 섬겼습니다. 그때부터 차세대 사역을 주로 했어요. 꿈땅, 차세대전체기획, 차세대본부장, 새벽나라(청소년QT) 편집장으로 사역하다 대전, 아부다비를 섬기고 노스시카고로 오게 됐습니다.
저는 따뜻한 목회자 되고 싶어요. 사랑하고 사랑 받는 목회자를 꿈꿉니다. 성도님들이 ‘이웃집 아저씨’라든지 ‘곰돌이 푸우’라고 불러주셨어요. 성격이 급한 약점이 있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입니다.

올해 10주년이 되는 노스시카고 온누리에서 저는 다섯 번째 목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노스시카고는 네이퍼빌시카고와는 다르게 청년보다는 성인 중심으로 인적자원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번 주 총인원이 115명이었습니다. 그중에 성인이 75명이고 나머지는 어린이와 청년, 청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에 한국교회에 세 들어 살다가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드리기도 했어요. 지금은 ‘루터’라는 미국교회에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노스시카고 온누리교회는
2004년 6월 27일 창립된 노스시카고 온누리교회. 성인 75명, 차세대, 청소년 40명이 출석하고 있다. 지역교회와의 연합예배, 가정세미나, 북한선교 세미나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윤길중 목사는 지난 1월 5일 담당목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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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늘 만나고 싶은 목회자 ‘이한규 목사’

이한규 목사이한규 목사

“4대째 믿음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전염병이 돌았대요. 할아버지도 전염병으로 죽을 위기였는데, 당시 할아버지를 돌보던 보모가 예수님을 믿었던 것 같아요. 그 분이 며칠을 꿇어앉아 할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대요. 동네 아기들이 다 죽었는데 할아버지만 살아남았다고 해요. 그 후 증조모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한 번도 교회를 떠나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신학교 입학 후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조직신학C(종말론, 교회론)라는 학생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수업이 있는데, 저는 그 수업을 통해서 회심했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컬러TV를 사오셨는데 흑백방송만 보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받은 충격이랑 수업시간에 받은 충격이 비슷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세상은 흑백이었는데 예수님 만난 이후 컬러로 바뀌었지요.
목회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 더 훈련 받아야겠다는 필요를 느꼈어요. 그래서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한국에 와서 두란노 해외 저작권 관련 일을 했습니다. 영문으로 나오는 책들 중에 한국에 소개되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선별하고 계약하는 역할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가 하는 사역에 기름 부어주셔서 베스트셀러가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함께 살기 위해 밴쿠버에 왔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가족처럼 함께 나누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벤트와 행사,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민사회에서 느끼는 상처와 외로움을 함께 살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저의 가족은 아내와 두 딸, 아들 하나가 있어요. 첫째 딸은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고, 둘째 딸은 올해 한국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중학교 3학년입니다.
저는 이민자로 살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잘 적응하는 것 같아요. 제 삶도 외로웠기 때문에 교인들과 삶을 나누고 싶은  갈망이 있어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니까 가족으로서 사랑을 나누게 하는 것이 저의 달란트라고 믿습니다.
 따뜻한 목사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동감하는 목회자, 어려움과 기쁨을 아는 목회자, 늘 만나고 싶은 그런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밴쿠버 온누리교회는?
밴쿠버 온누리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꿈꾸고 있다. 2003년 12월 21일 창립했다. 이한규 목사는 지난해 12월 29일 담당목사로 취임했다.

 

 
■ 단동

통일을 준비하는 목회자 ‘김대진 목사’

 

“대학을 갔는데 꿈이 없어졌어요. 원하는 걸 하고 있는데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고등부 교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변하게 되었어요. 원래 건축을 했지만 그 일보다 사람들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치 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서른다섯 살에 신학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땅이 가지고 있는 성격, 요소를 잘 조합시켜 건물이 자기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건축인데 목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사람 안에 있는 걸 발견하고 색깔을 입혀주고 드러나게 하는 것. 예수님 만난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형상들이 빛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하니까요. 그들을 바라보고 격려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아내는 청년부에서 만났어요. 마음에 들어서 쉬는 날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아내가 사는 동네를 찾아갔죠. 갈 때마다 거절당했어요. 추석 즈음에 마음을 모두 보여줬으니 생각해 보라고 시간을 줬는데 3일 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해 4월에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1년 후에 신학을 시작했고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이가 생겨서 지금은 10살, 9살 아들 둘을 두고 있습니다. 
통일이 멀지 않았고 이때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원해서 오게 됐습니다. 단동 온누리교회는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문을 열면 압록강이 있고 신의주가 있습니다. 국경지대인 만큼 지혜와 기도가 필요한 지역입니다. 또한 복음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또 단동 온누리교회는 중국 복음화를 위한 교회입니다. 중국인들을 잘 양육시키면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뿌리가 되지요. 이를 위해 체계화된 신학이 필요하고 교육콘텐츠를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단동 온누리교회는 회복하는 교회입니다. 성도들의 대다수가 애절하고 기고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애환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복음 안에서 위로하고 세워주어야 할 것입니다. 단동 온누리교회에 있으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게 되어 뭉클합니다.”

 

단동 온누리교회는?
1999년 4월 4일 문을 연 단동 온누리교회. 교회 문을 열면 압록강이 있고 신의주가 있다. 국경지대인 만큼 지혜와 기도가 필요한 지역. 김대진 목사는 1월 17일 취임했다. 

 

 

청도
‘오직 사랑’ 외치는 ‘최승구 목사’

 

“저는 4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미국 유학시절이었어요. 무척 외롭고 비전도 안 보여서 금식기도를 했는데 말씀을 받았어요. 하나님 음성을 듣게 되고 눈이 뜨이면서 저의 생각에 의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인생이 되었죠.
신학을 하려고 했는데 반대가 많았어요. 서른 살에 결혼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신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만류했어요. 결국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용조 목사님께서 횃불트리니티 신학생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셨어요. 당시 양재 온누리교회가 세워졌을 때였거든요. 그렇게 교회의 부르심을 받고 트리니티 1기생으로 신학교에 입학습니다. 20년 동안 기다렸던 부르심이 그때 이뤄진 것이었어요.
저는 믿음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기에 내일 일을 생각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도 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세상물정을 알다 보니 파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염려할 때도 있어요.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께서 저를 좋아해주셔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저의 가족은 아내와 두 아들이 있습니다. 제 인생의 결정적 사건은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저는 본래 결혼이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체험 후에 결혼에 대해 순종했죠. 그로부터 한 달 후, 아는 장로님의 아드님으로부터 불교집안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는 독실한 여자를 소개받게 됐어요. 믿는 가정에서 자라서 안 믿는 가정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진짜 믿음이 좋은 여자 같아서 부럽고 존경스러운 마음에 지금까지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청도 온누리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거든요. 사랑이 많다는 건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한다는 거죠. 저 역시 사랑의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과거가 만든 경험과 지식을 생각하면 소망이 설 자리가 없고 탐욕이 깃드는 것 같습니다.
청도 지역은 기독교 교인 수가 10만 명에서 2~3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청도 온누리교회도 30%가량 줄어서 성도 150명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맡겨드리기로 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힘들어지거든요.”

 

청도 온누리교회는?
2008년 3월 3일 창립예배를 드린 청도 온누리교회. 150명의 성도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최승구 목사는 지난 1월 15일 취임했다. 

 

 

■ 야치요

야치요에서 온 누리로, ‘니시야마 신이치 목사’

니시야마 목사니시야마 목사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머니가 모태신앙이었고, 아버지는 모태신앙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가정교회를 인도하실 정도로 아버지 신앙이 좋으십니다. 저는 대학교 입시에 떨어진 후 크게 낙심했어요. 그때 영적으로 재충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에 잠시 오게 됐죠. 어느 찬양집회를 갔었는데 설교하시는 선교사님께서 우리들(일본인)을 보면서 ‘(일본인)청년들이 헌신하지 않으면 (일본의)미래가 어떻게 되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되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신학교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일본 신대원을 다니려고 했는데 조건이 맞는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 오사카에서 러브소나타가 열렸는데 당시 서빙고 일본어예배 협력목사로 계셨던 다카미자와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목사님의 소개로 길이 열려서 신학공부를 하러 2007년 9월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기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그리고 온누리교회 일본어예배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교육전도사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습니다. 교육전도사의 사례비 개념도 없고요. 하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와 사역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들어가자 길이 열린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믿고 나아가니 제 길이 열린 것 같아요.
온누리교회에서 훈련받을 수 있었던 것이 제게 가장 큰 보탬이 되는 것 같아요. 온누리 스피릿, 선교마인드와 역동성을 야치요 온누리교회에 접목시키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야치요에서 전 세계로(온누리로) 뻗어나가는 꿈’을 품었습니다. 차세대 리더십을 양육하고 싶어요. 연령적인 차세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차세대가 되어 새로운 사람을 전도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도록 돕는 것이 저의 비전이자 목표입니다.
야치요 온누리교회는 따뜻하고 성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시키지 않아도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어요. 야치요는 작은 교회이지만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회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일본어예배부에서 사역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지금 20개월 된 딸이 있고요. 한국말과 일본어로 옹알이를 하는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저는 늘 웃는 모습입니다. 정작 화가 나도 얼굴은 웃는 모습이라 사람들이 친근함을 갖고 다가와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역할을 많이 합니다.”

 

야치요 온누리교회는?
일본 비전교회로 가장 처음 세워진 야치요 온누리교회. 1996년 10월 30일 창립된 야치요 온누리의 전신은 오와타신덴 그리스도교회로, 온누리교회 첫 장로 선교사인 조성록 선교사가 창립한 교회다.

 

 

■ 호치민

행복한 교회, 행복한 목사 꿈꾸는 ‘박영근 목사’

박영근 목사 (1)박영근 목사 (1)
“저는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온누리교회에서 만났어요. 저는 고신 측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가 1983~4년도라 온누리교회가 세워지기 전이었죠. 당시 하용조 목사님이 부산에 오셔서 고신 측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하셨어요. 그때 온누리교회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온누리교회에 가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는지 1986년도에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됐습니다. 1987년 9월 온누리교회에 와서 1988년 1월에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새가족 9주 과정을 듣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가정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되었어요. 직장생활을 선택하면서 ‘다시는 목사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년 만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목사는 하지만 선교사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었습니다. 1997년도 여름. 온누리교회 청년부 전도사로 섬기던 제가 청년들과 스리랑카로 아웃리치를 갔습니다. 제가 설교했는데 말씀을 전하는 중에 하나님께 콜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영근, 너 나 사랑해?’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네 설교를 듣고 있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느냐?’ 하셨어요. 한국에 돌아왔는데 일 년 내내 저도 모르게 지상명령에 관한 설교만 했어요. 설교 듣는 청년들이 반응을 안보여 ‘당신들이 안가면 내가 간다’고 말했는데 정말로 아내와 함께 선교사 훈련을 받고 1999년 6월 25일에 스리랑카로 떠났습니다. 13년을 사역했고 재작년에 부천 온누리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하다 올해 호치민 온누리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 달 되었어요.
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말씀 전하고 함께 기도하는 걸 좋아합니다. 선교지에 있으면서 그것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큐티와 일대일도 많이 하고 좋아하지요. 온누리교회의 생명이 큐티와 일대일 아닙니까.
가족은 아내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아들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지금 군에 가있습니다. 카추샤라서 용산 미군부대에 가있는데 올해 7월에 제대합니다. 딸은 대학교 1학년입니다.  올해 9월이면 둘이 같은 학부, 같은 학년으로 만나게 됩니다.
제가 호치민 온누리에서 취임했을 때 성도님들께 행복한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행복한 목사가 되고 성도님들은 행복한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어요. 재미있는 교회, 재미있는 목회, 행복한 교회, 행복한 목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호치민 온누리교회는?
호치민 온누리교회는 2011년 8월에 시작되어 올해 8월이면 3주년을 맞는다. 2010년부터 온누리교회 세 명의 안수집사와 타교회 안수집사 한 명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목회하던 목회자와 함께 교회 개척을 준비했다. 초기 30~40명이었던 교인은 지금은 성인 200명, 차세대 150명이다.

작성자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