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해외캠퍼스

해외비전교회를 가다-오사카, 교토, 나고야 온누리교회

일본 온누리 비전교회 역할 ‘선한 영향력’

 

기본은 큐티와 일대일, 특성 고려한 맞춤사역은 덤
일본 교계, 지역사회, 차세대, 가정에 꿈과 희망을

 

오사카, 교토, 나고야 온누리교회를 다녀왔다. 일본 온누리 비전교회는 모두 7곳이다. 동북부 우에다, 수도권 도쿄, 야치요, 요코하마, 중서부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 있다. 일본 온누리 비전교회는 지역사회와 차세대를 섬기면서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다. 영적으로 척박한 땅에서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 맺고 있었다. 일본 온누리 비전교회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여기는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오사카와 교토를 방문하려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다. 2시간이 지나도록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수속을 마치고 오사카 시내로 향했다. 오사카의 제일 번화가 신사이바시 거리를 거닐었다. 이곳은 식도락가와 쇼핑객들의 천국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사카 온누리교회가 있다.
오사카는 일본 제2의 도시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였다. 도시 단위 경제 규모로 세계 3위, 도시권 인구 세계 12위로 도쿄와 더불어 명실상부 일본의 경제,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곳이다. 오사카는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천하를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정치적 본거지이다. 기독교 박해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1549년 자비에르 선교사가 가고시마에 입항해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일본 선교의 시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 막바지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를 탄압하고 앞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독교를 수용했다. 1,600년 일본 기독교는 성도수가 50~75만 명에 이를 정도로 부흥했다. 당시 일본 인구가 1,500만~2,00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오다에 이어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기독교에 관대했다. 가스펠 코넬 신부를 초청해 자신이 건축한 오사카성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가사키에 갔을 때 포르투갈 선교사 코리오 신부가 그를 맞이했는데 긴 칼을 찬 군인의 모습이었다. 코리오 신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군함의 대포와 장비를 자랑삼아 구경시켰다. 오사카성으로 돌아온 도요토미는 곧바로 기독교 포교 금지령과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포르투갈 함대의 위력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의 추방령에 따라 1597년 나가사키에서 26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가사키 26인 성인(聖人) 순교사건’이다.
도요토미에 이어 전국시대의 마침표를 찍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3월 도쿄와 오사카, 교토에 금교령을 발표한데 이어 이듬해 12월에 이 명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614년 오사카 이바라키 지역의 대표적인 크리스천 다이묘(영주)였던 다카야마 우콘을 마닐라로 추방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후계자들은 더 철저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이 시기 무려 20~30만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당시 기독교인 3명 중 1명꼴이었다. 도쿠가와의 에도막부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박해를 계속했다. 1640년 데라우케(모든 서민을 절에 종속시킨 일종의 호적제도), 1659년 5인제 감시제도(5가정을 한 조로 묶어 서로를 감시케 한 것으로,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남자는 7대, 여자는 4대까지 격리 후 특별감시) 등을 통해 기독교인을 발본색원한다. 예수나 마리아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후미에’를 통해서도 기독교 신자들을 색출했다.
극한으로 내몰리게 된 기독교 신자들은 첩첩산중 오지로 숨어들어 신앙을 숨기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을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성모상을 관음보살상 처럼 만들고, 불교용품에 십자가를 몰래 새겨 신앙생활을 했다.
1919년 가쿠레 기리시탄 마을과 유물이 오사카 이바라키시 센다이지에서 발견됐다.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 1987년 ‘이바라키시립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사료관’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이곳에 가면 왜 크리스천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바라키 시내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있다.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없다면 이런 곳에 박물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음침한 곳이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길을 지나야 했다. 자손들에게조차 철저히 비밀로 지켜야했던 그들의 신앙이 발견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을 입을 닫고 살아야했는지 모른다.

오사카에 있는 '이바라키시립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사료관' 전경오사카에 있는 '이바라키시립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사료관' 전경

오사카에 있는 ‘이바라키시립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사료관’ 전경

가쿠레 기리시탄 마을에서 나온 무덤비석가쿠레 기리시탄 마을에서 나온 무덤비석

가쿠레 기리시탄 마을에서 나온 무덤비석

십자가없는 예수상. 오른쪽의 작은 상자 안에 담겨져 있었다.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십자가없는 예수상. 오른쪽의 작은 상자 안에 담겨져 있었다.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

십자가없는 예수상. 오른쪽의 작은 상자 안에 담겨져 있었다. 가쿠레 기리시탄 유물.

 

오사카 온누리교회,
차세대, 지역교회 연합, 전도에 집중

 

오사카 온누리교회 전경. 건물 2층(차세대공간)과 3층(사무실,예배실)이 교회다.오사카 온누리교회 전경. 건물 2층(차세대공간)과 3층(사무실,예배실)이 교회다.

오사카 온누리교회 전경. 건물 2층(차세대공간)과 3층(사무실,예배실)이 교회다.

 

오사카 온누리교회 이영선 목사 부부와 청년들의 모습.오사카 온누리교회 이영선 목사 부부와 청년들의 모습.

오사카 온누리교회 이영선 목사 부부와 청년들의 모습.

 

오사카 온누리교회는 2000년 4월 창립됐다. 최초의 온누리 해외 비전교회다. 일본인 사업가가 하용조 목사에게 상가 건물 3층을 예배당으로 기증한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하용조 목사는 오사카 온누리교회에 김 사무엘 선교사를 파송했다. 김 사무엘 선교사는 매주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예배를 섬겼다.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섬기면서 오사카 온누리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2001년 10월 이영선 목사가 담당목사로 부임해 약 8년 동안 섬겼다. 이영선 목사는 미국과 시모노세키에서 사역을 하다가 올해 2월 다시 오사카 온누리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오사카 온누리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주변 교회들의 반감을 샀다. 대형교회가 들어와 성도들을 뺏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오사카 온누리교회는 주변 교회들의 의심을 덜기 위해 기본(큐티, 일대일, 예배)에 충실했다. 2003년 목회사관학교를 기점으로 사역이 확장됐다. 처음으로 가정사역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영선 목사는 가정사역이야말로 일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하나님의 가정훈련학교,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등의 가정사역 프로그램들을 교회에 도입했다. 큐티와 일대일로 기반을 다지고 거기에 가정사역을 더했더니 교회가 눈에 띄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200명의 성도가 목표였는데 400명 가까이 늘었다.
오사카 온누리교회 새신자반을 섬기고 있는 나가오카 아키코 집사는 어머니학교도 열심히 섬기고 있다. 7년 전 어머니학교 세미나를 처음 들은 나가오카 집사는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일본에 가정사역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머니학교팀을 꾸려 규슈와 나고야 등지로 아웃리치도 다녀왔다. 일본인 강사도 생겼다. 그녀는 어머니학교가 더 많은 일본 교회에 소개되어 가정이 바로서고, 나아가 교회와 나라가 바로 서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오사카 온누리교회는 3가지 중요한 사역방향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차세대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차세대들에게 세상적인 사고보다 믿음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재일교포 자녀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심어줘야 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와 나라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것도 깨우쳐 줘야 한다. 이영선 목사는 6년 만에 돌아온 오사카에서 그 희망을 목도했다. 교회학교 학생이었던 청년이 어엿한 교사가 되어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은 아이들이 자라서 또 다른 다음 세대를 세워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두 번째는 지역교회와 연합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오사카 온누리교회 초창기에는 주변 교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러브소나타 집회를 함께하면서 주변 교회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전도다. 특히 새신자들이 쉽게 찾아오는 교회를 만들 생각이다. 문턱이 낮은 교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이영선 목사는 종교 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다. 종교법인화는 교회 명의로 계약하고 기부를 할 수 있는 제도다. 지금은 종교 법인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교회 이름으로 계약하지 못하고, 목사 명의로만 할 수 있다. 재정의 투명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자 이영선 목사는 3년이나 걸리는 지루하고 번거로운 심사를 신청했다.

 

교토 온누리교회, “전도는 생활입니다”

 

두 번째 방문지는 교토 온누리교회다. 교토는 천년 가까이 일본의 정치,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다.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답게 도시 전체가 문화재로 가득하다. 일본 국보의 무려 20%가 교토에 있다. 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교토대 등 38개의 대학교가 있다.
교토도 기독교 박해가 심했던 지역이다. 1619년부터 1623년 사이 나가사키와 도쿄, 교토에서 순교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겐나 대순교’사건이다. 1619년 교토에서 기독교 신자 52명이 27개의 십자가에 달려 화형을 당했다. 그들 중 무려 11명이 어린이였다. 당시 순교의 흔적을 말해주는 겐나 기리시탄 순교비가 교토 가모가와 강변 길가에 세워져 있다. 얼핏 보면 돌비석에 불과하다. 그 돌비석만이 400년 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교토에 있는 겐나 기리시탄순교비교토에 있는 겐나 기리시탄순교비

교토에 있는 겐나 기리시탄순교비

 

교토역은 교토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곳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교토역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일본 비전교회 중에서 가장 최근에 생겼다. 야마나카 토모요시 목사가 담당하고 있다. 2010년 11월 시작됐다. 주일 11시에 일본어예배를 드리고, 오후 2시30분 한국어예배, 저녁 5시30분 영어예배를 드리고 있다. 주일 새벽 6시30분에 새벽기도회가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교토 온누리교회 주보에는 각종 기도회와 집회, 모임과 세미나 안내로 빼곡했다. 연간 스케줄표도 마련되어 있다. 모든 성도들에게 교회의 비전과 목표, 주요 행사 등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역하고 있는지 모른다.
교토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교토 온누리교회에도 외국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일본인과 한국인, 외국인 성도 비율이 무려 4:2:4라고 한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전도에 집중하고 있다. 야마나카 목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성도들이 전도를 생활화하고 있다. 전도폭발 프로그램을 도입한 이후부터 달라졌다. 야마나카 목사는 1992년 미국 유학시절에 전도폭발을 접하고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전도폭발을 접목해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일본교회에도 전도폭발 프로그램이 전해지긴 했지만 활성화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교재도 조악했다. 일본어로 번역까지 한 야마나카 목사는 교토 온누리교회 개척 초기부터 전도폭발 프로그램을 적극 적용했다.
야마나카 목사는 전도에 탁월한 역량이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야마나카 목사가 전도한 사람이 200명이다. 그중에 144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13명은 세례를 받았다. 교토 온누리교회 성도들도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다테미 카즈에 성도(73세)는 전도폭발을 경험하고 삶이 달라졌다고 했다. 전도폭발 훈련을 받고 나서부터는 스스럼없이 주변 사람들을 전도하게 됐다고 했다. 전도폭발을 일본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안성맞춤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했다.
핫토리 다케시 전도사도 “교토 온누리교회가 계속 전도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교토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전도를 생활화하고 있었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창립된 지 5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지만 성도 수가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연간 150명 이상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10명 이상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목표다. 향후 15년 동안 전도폭발 프로그램을 400개 일본교회에 도입해 연간 만 명을 전도한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웅대한 꿈을 품고 있는 교회답게 기도부탁도 잊지 않았다.
“교토 온누리교회는 서울 온누리교회가 낳은 교회입니다. 교토 온누리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시고, 기도해주십시오.”

교토 온누리교회 야마나카 목사 부부와 성도들교토 온누리교회 야마나카 목사 부부와 성도들

교토 온누리교회 야마나카 목사 부부와 성도들

예배 후 새신자들과 함께 다과.예배 후 새신자들과 함께 다과.

예배 후 새신자들과 함께 다과.

 

 

나고야 온누리교회

무너진 가정 살리는 가정사역 중점

 

마지막 방문지는 나고야 온누리교회다. 신오사카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1시간 남짓 가면 나고야에 도착한다. 나고야는 일본 열도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대도시다. 일본의 허리다. 나고야는 일본 전국시대 3대 무장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난 곳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통일을 이룬 뒤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축조한 나고야성은 오사카성, 구마모토성과 함께 일본 3대 성(城)으로 꼽힌다. 이 같은 이유로 나고야 시민들의 자부심과 보수성이 유독 강하다.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 나고야다.
기독교 박해 흔적이 어느 도시보다 진하고 강렬하게 남아 있다. ‘에이코쿠지(栄国寺) 기리시탄 유적박물관’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곳은 원래 죄인들을 처벌하던 형장이었다. 1664년 기독교인 200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형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참수된 기독교인들의 공양탑을 세웠다. 기리시탄 무덤과 그들의 유물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었다. 솔직히 박물관이라고 말하기 애매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유물 몇 개가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 근처에 ‘히가시베쓰인’이라는 크고 웅장한 절이 있다. 그곳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관하고 있는데 에이코쿠지 기리시탄 유적박물관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에이코쿠지 기리시탄 유적박물관 입구. 에이코쿠지 기리시탄 유적박물관 입구.

에이코쿠지 기리시탄 유적박물관 입구.

기리시탄 무덤. 처형된 기리시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기리시탄 무덤. 처형된 기리시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

기리시탄 무덤. 처형된 기리시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

씁쓸함과 스산함을 뒤로 하고 나고야 온누리교회에 갔다. 교회는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시끄럽고 번잡한 오사카와 어디를 가나 관광객들로 넘쳐났던 교토와 달리 조용하다.
나고야 온누리교회는 이화다이아몬드 김수광 장로가 회사 2층을 교회 예배당으로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요시하라 목사가 담당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2006년 11월부터 8년 넘게 나고야 온누리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지난 4일 요코하마 온누리교회에서 5년 넘게 사역하던 김철희 목사에게 바통을 넘겼다.
나고야 온누리교회는 젊다. 젊은 엄마들이 많고, 어린 자녀들도 많다. 한국인과 일본인 성도 비율이 6:4 정도다. 국제결혼 한 커플이 많다. 나고야 온누리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한 사역과 이민자 케어사역에 힘을 쏟고 있다.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바자회, 가정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국제결혼 한 커플들의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회복사역과 하나님의 가정훈련학교, 아버지학교 세미나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2010년 열린 나고야 러브소나타를 위해 보수적인 나고야 교계와 협력한 것도 괄목할 만한 결과다. 그때부터 지역교회와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당시 맺은 협력의 끈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보를 공유하고 사역도 공유하고 있다. 협력도 도모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중부권 대도시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 세워진 온누리 비전교회를 둘러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서울 온누리교회가 그대로 일본에 옮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곳 모두 온누리교회 양육의 핵심가치인 큐티와 일대일을 통해 성도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거기에 각 교회가 위치해 있는 지역적 특성을 따라 맞춤사역을 실시하고 있었다.
영적으로 메마른 땅 일본에서도 Acts29 비전이 쓰이고 있었다. 일본 교계, 지역사회, 차세대 들에게 꿈을 노래하고, 희망을 선물하고 있었다. 일본 온누리 비전교회의 역할이 봄햇살보다 더 따뜻하고, 눈부셨다.

 

나고야 온누리교회에 새로 부임한 김철희 목사 부부(좌)와 8년간 나고야 온누리교회를 담당했던 요시하라 목사 부부(우)나고야 온누리교회에 새로 부임한 김철희 목사 부부(좌)와 8년간 나고야 온누리교회를 담당했던 요시하라 목사 부부(우)

나고야 온누리교회에 새로 부임한 김철희 목사 부부(좌)와 8년간 나고야 온누리교회를 담당했던 요시하라 목사 부부(우)

지난 4일에 있었던 나고야 온누리교회 이취임예배 단체컷지난 4일에 있었던 나고야 온누리교회 이취임예배 단체컷

지난 4일에 있었던 나고야 온누리교회 이취임예배 단체컷

 

작성자  김남원 기자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