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형제의 화해

창 33:1-11

이재훈 목사

 

하나님의 은혜로 화목하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삶 속에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날마다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권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천하기 힘든 것이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한 에버릿 워딩턴이라는 미국의 대학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용서에 관한 많은 책을 썼고,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강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과연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는 용서에 대해 가르치고, 책을 쓴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용서가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느끼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용서는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문을 열어야만 가능합니다.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적인 힘을 주셔야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때로 용서하기로 결단 하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용서보다 힘든 화해

 

전문가들은 용서를 결단의 용서와 정서적인 용서로 구분합니다. 결단의 용서는 자신이 용서하기로 결단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상처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변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정서적인 용서가 되어야 진정한 화해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단의 용서만으로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의 목표는 화해입니다. 용서는 혼자 할 수 있지만 화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화해는 쌍방 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화해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용서는 감정이 풀리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화해는 감정이 모두 풀려야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거나 변화되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화해는 회개를 해야 하고 변화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신뢰까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값싼 화해는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고, 쌍방 간에 결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어느 작가는 ‘용서가 산 중턱에 있는 폭포와 같다면 화해는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 발을 담그는 것’이라고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화해가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를 넘어 화해에 이르는 축복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대가로 우리를 용서하셨고 용서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제물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삶을 동행할 수 있는 화해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오늘 본문은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해칠까봐 두려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비책을 준비했습니다. 두 여종과 그의 자녀들, 레아와 그의 자녀들, 라헬과 요셉 순으로 세우고 에서에게 갔습니다. 이 줄은 야곱이 사랑하는 사람의 순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가장 뒤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먼저 변화되기를 원하셨고 그의 엉덩이뼈를 위골시키셨습니다. 엉덩이뼈가 어긋나 있을 때 그의 모든 계획이 틀어지면서 이기심이 무너졌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패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며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러 화해의 자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눠 맡겼습니다. 그는 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맨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 다음에 세웠으며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웠습니다. 야곱은 그들의 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리어 일곱 번 절하며 자기 형에게 다가갔습니다”(1~3절).  야곱이 가장 앞에 서서 에서에게 일곱 번 절을 하며 다가갔습니다. 리브가의 꿈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는데 야곱이 에서에게 절을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먼저 몸을 굽힐 줄 알아야합니다.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간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먼저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눈물 흘려며 화해하는 형제

 

역대하 7장에 보면 한 나라가 위기에 쳐했을 때 하나님이 제시한 해결책이 나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스스로 낮아져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며 그 땅을 고칠 것이다”(대 7:14).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들’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먼저 문제해결의 주도권이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 절을 하며 용서를 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에 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맞았습니다. 그는 야곱을 부둥켜안으며 두 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울었습니다”(4절).에서가 달라졌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용서하고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때 그들이 과거에 서로 주고받았던 상처와 아픔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을 미리 용서한 에서 에서가 ‘부둥켜안으며 두 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췄다’는 행동은 동사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길 때에도 에서의 행동을 동사 중심으로 묘사했었습니다. “그제야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붉은 죽을 주었습니다. 에서는 먹고 마신 후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이처럼 에서는 자기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습니다”(창 25: 34). 에서가 얼마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사람이었는지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에서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본능적인 사람 에서가 관계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이던 사람이 용서와 화해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서에게서 야곱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에서가 야곱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 하나님이 에서를 만져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듯이 에서를 만나주셨기 때문에 에서가 변화된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한 것은 과거에 야곱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새카맣게 잊어서일까요. 아니면 야곱이 보낸 선물을 받고 기분이 풀려서 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화해는 물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받고 에서의 마음이 풀린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야곱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이미 용서하고 있었던 것처럼 에서도 야곱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

 

야곱은 에서를 편하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여겨달라고 했던 것처럼 야곱도 에서에게 자신을 종으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에게 “내 동생아. 너는 내 동생이다”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여러분, 아직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 에서와 야곱이 감동적인 화해를 한 것처럼 그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화해와 용서를 체험해야합니다. 혼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화해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에서와 화해한 야곱에게서 세 가지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야곱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님의 종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신 자식들입니다’”(5절). 야곱의 언어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가 깊이 배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은혜일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오염되지 않은 단어도 은혜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 ‘은혜’

 

야곱의 언어 속에 은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듯이 우리도 은혜라는 단어를 많아 쓰기를 를 바랍니다. 이것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이전과 이후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입니다. 죄는 관계를 깨뜨리지만 은혜는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화해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쌓인 관계의 독 때문입니다. 이 독을 어떻게 해독하면 될까요. 몸에 있는 독은 약으로 해독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생긴 독은 세상의 어떤 약으로도 해독할 수 없습니다. 해독할 수 있는 약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관계의 독이 씻깁니다. 은혜를 한두 번 체험해서는 독이 씻기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 찬양과 묵상을 통해 은혜를 고백할 때 관계의 독이 씻깁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은혜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화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 가진 ‘하나님의 자녀’

 

둘째, 야곱은 자신이 받은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서가 물었습니다. ‘내가 만난 이 가축 무리들은 다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제 주인이신 형님께 은총을 입고자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자 에서가 말했습니다. ‘내 동생아, 나는 이미 가진 것이 많다. 네 것이니 네가 가져라.’ 야곱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형님의 은총을 입었다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저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형님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발 형님께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셔서 저도 넉넉합니다.’ 야곱이 끝까지 권하자 에서가 받았습니다”(8~11절).  이 장면은 야곱이 에서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래 야곱이 준비한  선물은 에서에게 줄 뇌물의 성격으로 준비한 선물입니다. 에서는 선물 때문에 야곱을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선물을 받지 않으려는 에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과 영어성경에서는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원문에는 축복이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눠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주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형님에게 주는 축복을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나는 전부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독특한 관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의 고백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나누기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에 관한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고전 3장 21~23절).

여러분, 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없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 사회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을 사람들의 마음대로 쓰도록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만큼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이러한 과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모든 것을 가졌다는 고백은 허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요, 야곱의 것이 맞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나눠줄 때에는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나눠야합니다. 

 

셋째, 야곱은 자신을 용서하는 에서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형님의 은총을 입었다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저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형님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10절).참된 화해는 화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의 축복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됩니다”(요 4: 12).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고린 5: 17~19절)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은 화해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게 하는 사역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당신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박정일 meteojiop@nate.com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에서와 야곱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우리의 삶속에도 본능적으로,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용서와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에서를 변화시키고 야곱을 변화시켰던 하나님, 우리의 삶속에 이와 비슷한 사건과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녹여주시고, 무너뜨려주시고, 해결해주시고 모든 독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