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성장하고 계십니까

 

요한일서 2장 12~14절
이재훈 목사

 

어릴 적 고향집 근처에 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고향집 근처에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의 몸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몸이 자라지 않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러한 안타까운 병이 영적 성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 육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영적 생명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모순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성장해야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영적 성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엡 4:15~16).
“도리어 우리 주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십시오.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벧후 3:18).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자라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성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길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편안한 삶, 더 안락한 삶, 더 쉬운 삶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하는 것은 새가 나는 훈련을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유롭게 날수 있도록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영적 성장의 지표

 

영적 성장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영성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이 익숙해졌다고 그것이 곧 영적 성장에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활동이 많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지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성장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것이 지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계속 이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2~14절).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제의 변화입니다. 원문을 보면 시제가 바뀝니다. 12,13절은 현재시제인데 14절은 과거시제입니다.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할 때 방금 전에 쓴 것을 과거형으로 바꿈으로써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 온누리교회 표어가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입니다. 만약 제가 “우리가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방금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표현하면 현재시제를 과거시제로 바꾼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시차를 두는 것입니다.

 

성도가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

 

세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12절에 자녀들, 13절에 아버지와 청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호칭은 육체적인 나이와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자녀의 신앙 수준, 아버지의 신앙수준, 청년의 신앙수준으로 영적 성장의 단계로 해석했습니다. 이 호칭은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견해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여’라는 호칭이 특정 단계에 있는 성도들만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일컬을 때 ‘자녀들이여’ 라는 했습니다. 노년의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자녀들처럼 여겼습니다. 자녀들이 나오고, 아버지들이 나오고, 청년들이 나오는 순서는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요엘 2:28).
여기서도 아들과 딸들이 나오고, 늙은이가 나오고, 젊은이가 나옵니다. 아들과 딸들은 자녀들이고, 늙은이들은 연세가 많은 분이고, 그 다음이 청년들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모습을 호칭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이 호칭이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칭의 변화에는 분명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죄 사함을 경험하는 단계가 있고, 아버지를 깊이 알아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성장해야 될 세 가지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역을 연령별, 호칭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

 

우리가 영적 성장을 이뤄야 할 세 가지 영역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2절과 14절 초반부를 읽겠습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됐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2, 14절).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적 성숙을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은 죄 사함입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부모의 품입니다. 때로 자녀들은 잘못을 해도 부모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용서에 대한 기대에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의 죄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 사함의 교리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얻는 지식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영적 성숙이 멈춥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그때부터 의인이라고 가르치는 구원파의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이지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닙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를 용서받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지를 측정해보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영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

 

둘째,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중간부를 읽겠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14절).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은 육체의 나이와 믿음의 나이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영적 수준이 어린이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젊지만 영적 아버지로 성장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되어 있는데 스펄전 목사는 그것을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직역하면 ‘원로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원로(장로)는 ‘자켄’인데 자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형용사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사를 씁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정의의 아들’이라고 쓰면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명사로 형용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로들의 아들’이라는 것은 ‘원로 같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지혜와 성숙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요셉이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라서 더 사랑했다면 요셉보다 베냐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녀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은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품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녀들이 아비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선생들은 많은데 아비는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은데 한 영혼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영적 아비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부족합니다. 아비가 많은 시대의 교회는 한 영혼을 책임지고, 양육하기 때문에 사생아가 없습니다. 버려진 자녀가 없습니다. 모두가 돌봄을 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선생이 많고 아비가 없는 곳에는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영혼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십니다.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안다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영적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

 

 

셋째,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후반부를 읽겠습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3~14절).
청년들은 힘이 세고 강합니다. 육체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육체의 강함은 오히려 죄를 범하기 쉽니다. 넘치는 에너지가 과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실수가 많고, 잘못 행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삼손의 강함입니다. 삼손은 힘이 세고, 근육이 많고, 에너지가 많았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함은 은혜 안에서의 강함입니다. 약함 속에서의 강함입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강함입니다. 육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강함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뚝이 같다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쓰러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은혜가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강함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강함이 아닙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는 강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할 때 악한 자를 이깁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위기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 말씀의 지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된 말씀이 위기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 악한 자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을 받는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의 역사하심과 섭리, 계획과 뜻을 깨닫는 아버지로 성숙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악한 자를 능히 이기는 청년으로 성장하십시오. 영적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는 영적 성장을 이루십시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