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일서 3장 11~24절
이재훈 목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조직의 행동과 의사결정에 대한 전문가인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제임스 마치 교수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 두 종류의 의사결정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결과를 중시하는 모델입니다. 비용과 이익을 따져서 나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올지를 생각하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단기적인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체성을 중시하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주로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체성에 근거한 결정이 아니면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법이 아무리 정교해도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체성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지식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못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못하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체성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를 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하도록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됐으니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일 3:1).
이 말씀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깨달을 때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대개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거나 태어난 지역을 말합니다. 과거의 직책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저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바로 그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어야합니다.
인생을 아무렇게 살거나 잘못 된 삶을 사는 이유는 누구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마음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사랑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사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면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인생을 잘못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정체성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정체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입니다. 그는 매우 성실했습니다. 둘째 아들처럼 집을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봉사했고,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갔다 돌아온 동생이 아버지의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불평하고 분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실하고 착한아들이라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했을 텐데 그는 왜 분노하고, 불평했을까요.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순종했고, 의무를 다했지만 아버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동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의무를 다한 것이지 기쁨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요한일서는 무너지고 망가진 정체성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유독 ‘알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이나 가정이 아닙니다. 체험적인 지식이요, 확신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지식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앎’이라는 단어와 ‘삶’이라는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앎과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정말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14절).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옮겨질 것’이라는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옮겨졌다’는 과거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음 안에 있다가 생명으로 옮겨질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이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영생이 있다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형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설명한다면 종교적 율법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엔트로피 법칙과 신트로피 법칙
여러분, 의무감은 우리를 절대로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종교적 의무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에 머무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의무가 기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라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김영길 장로님이 쓴 <신트로피 드라마>입니다. 이 책은 과학법칙과 상반되는 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엔트로피 법칙은 1864년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가 최초로 사용해서 알려졌습니다. 이 법칙은 모든 물질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퇴화하고, 소멸해가고, 붕괴해가고, 부패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체는 엔트로피법칙을 따르지 않고 신트로피 법칙을 따른다고 합니다.
신트로피 법칙은 1941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루이지 판타피가 도입했고, 비타민C를 발명한 헝가리 태생 알베르트 센트죄르지가 인용했다고 합니다. 생명체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신트로피 법칙이 작용해서 질서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생명 안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아니라 신트로피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엔트로피 법칙만 존재하는 것처럼 점점 무질서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분쟁하고, 싸우고, 전쟁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엔트로피 법칙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 안에는 신트로피의 법칙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갈등하던 사람들이 화목하게 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이 바로 신트로피 법칙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고, 신트로피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엔트로피 법칙을 따라 사는 대표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가인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살인까지 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엔트로피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으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그 형제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다윗을 질투하고,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두 동일한 패턴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면 갈등하고, 미워해서 붕괴되고, 쇠퇴합니다.
정반대 흐름이 또 있습니다. 신트로피 법칙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고, 그들을 축복함으로서 새로운 백성들의 물줄기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 모든 고난을 이김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 지도자들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미워하고 질투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신트로피 법칙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엔트로피 법칙과 신트로피 법칙이 늘 상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신트로피 법칙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질투와 미움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축복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까지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땅합니다”(16절).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통해 세상에서 신트로피 법칙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땅하다는 것은 기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무를 넘어서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정말 아는 단계에 도달한다면 앎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랑까지 발전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영적 목표입니다. 그 출발점이 어디일까요.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7절).
이것이 시작입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맞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이 커져야합니다. 바로 그것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증거
“자녀들이여,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18절).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하고, 구한 것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증거입니다.
“혹시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 마음에 가책 받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20~22절).
20절은 해석이 어렵습니다. 역사적으로 상반된 해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도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위로하는 구절로 해석했습니다. 칼빈은 정반대로 해석했습니다. 경고의 구절로 해석했습니다.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후예인 장로교이기 때문에 칼빈의 해석을 따라야합니다. 경고의 구절로 해석해야 합니다.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떳떳하고 가책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적할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자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이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확실히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하면 우리가 구한 것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응답받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친밀한 자녀가 되는 조건입니다.
“네가 굶주린 사람에게 열정을 쏟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네 빛이 어둠 가운데 떠올라서 네 어둠이 대낮처럼 밝아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언제나 이끄시고 땡볕이 내리쬐는 마른 땅에서도 배불리시며 네 뼈를 단단하게 하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다”(사 58:10~11).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는 자녀가 되는 것은 조건적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했느냐에 따라 더 깊은 사랑가운데 거하는지가 결정됩니다.
간신히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간신히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신트로피 드라마를 써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