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정말 아십니까?
요일 2장 1~11절
이재훈 목사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다 알고 있는 사람일까요”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유명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두 사람 다 알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다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앎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를 취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성도도 있고, 안다고 생각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
요한일서는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를 피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참되게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고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요일 5: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그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신하고, 체험하도록 돕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안다’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특히 2장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3~5절).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4절).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21절).
요한일서에서는 왜 ‘안다’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을까요. 당시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후에 이것을 ‘영지주의’라고 이름 붙였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혼합된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어 ‘그노시스’는 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Knowledge’입니다. 지식, 앎이라는 단어로 번역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적이고, 초월적인 지식을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사상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혼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고,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구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혼합된 믿음은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요한일서는 잘못된 믿음을 교정시켜주고,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증거가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해봐야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아는 지식과 체험하는 지식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마음으로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머리에 지식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마음의 지식이 쌓여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서서 구경하고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었다”(램 24:7).
정보로써 지식이 있고, 체험으로써 지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도를 보면 전 세계 어느 도시든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로써 아는 지식과 그 땅을 걸으며 체험한 지식은 전혀 다릅니다. 어느 청교도는 이것을 사색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사색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순종과 대면함으로써 아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건의 모양이 있는 지식과 경건의 능력이 있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체험한 지식은 다릅니다.
당시 많은 성도들이 머리의 지식, 정보로써의 지식, 경건의 모양으로써의 지식은 있었지만 체험적인 지식, 실천을 통한 지식, 마음의 지식, 경건의 능력이 있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값없는 용서와 자백
오늘 본문은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그 증거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내 자녀들이여, 내가 이 편지를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속하는 화목제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십니다”(1~2절).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의 맥락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지 말라는 율법만 주시고, 우리가 죄를 범하는지를 지켜보다가 죄를 짓는 순간 처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죄 짓는 것을 전제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죄 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은 자백을 통한 용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9절).
정말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자백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백을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용서해주십니다.
값없이 주는 용서가 궁극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값없는 용서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데 효과가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는 무서운 형벌을 가해야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문학작품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는 값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모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욕했던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십자가상에 달리신 예수님 입에서 처음 나온 기도는 용서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기도를 한번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속 해 오던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십자가를 끌고 갈 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도 예수님은 용서를 간구했습니다. 강도가 그 기도를 예수님 바로 옆에서 들었습니다. 그 용서의 기도를 듣고 영혼이 변화되고, 주님이 거하시는 낙원에 함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값없는 용서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
하나님의 용서는 눈감아주시는 용서가 아닙니다. 죄를 덮는 용서가 아닙니다.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한 공의로운 용서입니다.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한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들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과정은 변호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짓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변호사는 죄를 지은 사람의 편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죄와 형벌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죄를 짓지 말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 율법이라면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은 용서와 자백과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명령만 하는 부모는 절대 자녀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율법적인 부모입니다. 공부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환경을 만들어주고,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 진짜 격려입니다.
미국의 어느 주 교육청에서 학생들을 보충수업을 시키는 제도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학업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모아서 보충수업을 했는데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충수업대상자로 분리되는 순간 실패자나 탈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학습효과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의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그 여학생에게 연구의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여학생에게만 효과가 나타났을까요. 그 학생은 육상선수였는데 그 여학생을 지도한 교사는 열심히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육상경기 할 때처럼 힘껏 응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을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힘이 그 여학생을 변화 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는데서 그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이 부어질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합니다. 그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책망하고, 징벌하는 분으로 알면 겉으로 행하는 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와 은혜, 지지와 격려를 경험한 성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결과이자 열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며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전히 이뤄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자신도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3~6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은혜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자백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격려와 응원, 늘 우리 편에 서서 격려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분을 체험할 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차원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되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아느냐 여부가 시금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 지킬 힘이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지,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려를 받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넘어서 그것이 내 안에서 기쁨으로 역사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고 그 사람 안에는 그를 넘어뜨릴 장애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행하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9~11벌).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면 예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미움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사랑보다 미움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미움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미움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넘어뜨립니다. 미움은 우리를 어둠가운데 머무르게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합니다.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오고,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 벗어나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가운데 거하는 중요한 길입니다. 이것은 옛적부터 주어진 계명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레 19“18).
이 말씀은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해졌습니다.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결과요, 열매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증거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은 의무감으로 절대 극복할 수 없습니다. 미움을 내려놓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용서의 체험, 우리 곁에 계시는 변호사의 끊임없이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전히 이뤄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요일 2:5).
내 마음에서 미움이 제거 되고, 사랑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안에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증거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죄를 멀리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열매가 있어야 정말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줍니다.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곁에 계신 변호사 예수 그리스도의 격려와 용서, 그분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기를 사모하고, 그렇게 변화되어 갈 때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