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장 1~11절
이재훈 목사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면서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뤄가야합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를 논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도행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하고, 가르쳐주신 교회가 실제로 나타난 모습이 사도행전입니다. 모든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 문화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를 통해 이뤄졌던 하나님의 역사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해보려고 시작한 조직이 아닙니다. ‘에클레시아’라는 교회의 의미도 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믿는 사람들을 사도, 형제, 제자,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도 후에 생겼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주변인들이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비꼬는 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에 세 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안디옥에서만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주후 200년까지 믿는 사람들을 꼬집는 말로 ‘나사렛 도당’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주후 150년입니다. ‘폴리캅’이라는 교회지도자가 쓴 <순교사화>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기독교라는 정형화된 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는 기독교,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칭들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당시 교회는 조직체라기보다는 유기체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동체였습니다. 틀이 잡히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흘러갈 수 있는 유동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
사도행전적 교회는 ‘Liquid Church(유동체와 같은 교회)’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믿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 지위도, 재물도, 조직이나 통신수단도, 선전도구도 없었습니다. 아주 미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어 놨습니다.
세상을 요동치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조직이 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 조직을 움직이는 돈이 있습니다. 어떤 이념이 있습니다. 강력한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조직화된 체계도 없었고, 이름도 불분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사렛도당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정형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로마 제국을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현상을 이 세상의 어떤 사회학자들이 해석할 수 있을까요. 3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공인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력화되고, 조직화되고, 세상적인 힘을 덧입음으로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문제지만 강력한 영향력으로 성장한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치적 목표가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열심히 사회운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로마제국을 뒤집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로 되돌아간다면 한국사회가 뒤집어져야 합니다. 정치적 운동이나 사회이념운동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세력화가 아니라 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흔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적인 교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유동체적인 교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유동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빼고는 모두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익숙한 명칭과 익숙한 조직 등 모든 것들이 유동적 상태로 되돌아갈 때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공동체
“데오빌로여, 제가 먼저 쓴 글에는 예수께서 일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 곧 예수께서 선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명령하신 후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1~2절).
누가복음 누가가 썼습니다. 사도행전도 누가가 썼습니다. 사도가 쓴 것이 아닙니다. 두 편 모두 누가가 썼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입니다. 사도행전은 학위논문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발표할 역사서를 쓴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귀족을 전도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려주고, 사도들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온 세상에 전해질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두 구절에 사도행전적 교회의 첫 번째 정체성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입니다. 성령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서 임재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훌륭하게 살다가 죽은 위인의 과거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고 해도 죽으면 영향력이 끝납니다. 종교가 세워져서 그 영향력이 계속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영향력이 감소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 이후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은 아직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 그들의 눈앞에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모습이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9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부인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니 승천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 사건을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사고방식대로 해석하면 어떻게 사람이 중력을 법칙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5장에 하나님이 에녹을 홀연히 데려 가셨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은 꼭 선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믿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선례를 남겨 놓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신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성령공동체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 대로 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4~5절).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중요한 절기 때마다 모여 의식을 치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과정이 성취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과 예수님을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사야 말씀을 성취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시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이 끝나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저기 나타나셔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40일이 지난 후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에 이르기까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사시고, 고난 받고, 죽으시고, 승천하심으로 구원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성령님이 구원의 증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서들이 공통적으로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적 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이 시작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령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확신이 없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해서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증인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 세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확신 조건입니다. 교회의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행전적 교회의 이론이 됩니다. 물세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관습과 인습, 인간적인 철학, 세속적인 가치관과 전통문화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제도와 형식의 틀이 없는 유동체 같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 리더십들이 성령 세례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회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판단하고, 생각한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여러분, 성령 세례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을 기다리는 자에게 임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역사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 세례를 두려워하는 분이 계십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신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분별력이 더 뚜렷해집니다. 더 지성적인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엉뚱한 질문 같지만 근거 없는 질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맞는 질문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을 종말의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 이뤄지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논리가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요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같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 지금입니까?’”(6절).
존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그들의 질문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명사, 동사, 부사가 모두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회복하다는 단어는 영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통치되는 영적인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 때입니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쓴 것을 보면 여전히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열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입니다.
웨슬리 뉴 비긴이라는 선교학자는 사도들의 바로 이 질문이 이 시대 많은 교회들이 빠지는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 역사를 끝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빨리 역사를 끝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혹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 때문에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빠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모든 세상에 전파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증인공동체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8절).
사도행전적 교회의 세 번째 정체성은 증인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은 증인행전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져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헬라어로 증인이라는 단어는 ‘마르투스라’입니다. 순교라는 단어로 같이 씁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님에 관하여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끌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는 한 사람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소수의 성도들이 로마제국을 뒤집어엎고,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사실을 말하는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진실대로 말하는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을 안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생명의 위협이 오면 사실을 왜곡해서 거짓 증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시면 절대로 사실을 거짓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실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약은 사실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고, 사실이 사실대로 전해질 때 세상이 변화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증거가 온 세계를 향해 나갑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갑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모든 곳이 땅 끝입니다. 이웃집일수도 있고,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심으로 역사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11절).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재림의 날까지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적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온 세상에 증거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가 자라 추수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이요, 은혜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에는 역사가 끝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면서 증인공동체, 성령공동체, 예수공동체로서 사도행전교회의 참된 모습을 이뤄가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