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 4월 20일_ 하용조 목사 십자가, 고난과 순종의 모본

 

■ 4월 20일_ 하용조 목사

 

십자가, 고난과 순종의 모본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고난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이 십자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53장 1~7절

 

기독교의 전체적인 그림은 무엇일까요? 알렉산더나 스파르타커스 같은 세상의 영웅처럼 칼을 잘 쓰고 전쟁에 능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기독교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에 수많은 제국이 탄생했다 사라졌습니다. 애굽이 망하고 이집트가 망하니까 바로 뒤에 시리아가 나왔습니다. 시리아가 망하니까 페르시아, 희랍 문명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로마 문명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로마로부터 시작된 모든 제도와 법에 기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 나라와 그 위대한 왕과 그 능력 있는 칼잡이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

 

시편에는 “악인들은 곧 사라질 것이니 네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리라”(시 37:10)고 쓰여 있습니다. 악인의 존재가 너무 커서 그 앞에서 숨도 못 쉴 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을 치워버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모든 문명도 고난도 군대도 수많은 핏자국을 뿌리며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는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기독교는 새싹처럼 초라한 모습입니다. 큰 나뭇가지도 아니고 이제 갓 움트고 나오는 새싹입니다. 한 알의 밀처럼 우리가 볼 때는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고, 볼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볼품없고 매력도 느껴지지 않지만 눈을 뗄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한번 보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서서 계속 봐야하는 분입니다. 그분과는 끊임없는 대화가 생길 것 같고, 그분은 내 문제를 다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얼굴에는 땀과 피와 고통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떤 것입니까? 영웅적인 기독교입니까?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는 그렇게 인기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은 인기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양재에서 3개월 된 아기를 보았습니다. 사실 그 아기는 입양된 아기였습니다. 그 아기의 엄마는 아기를 입양하고 키운 지가 이제 3개월이 되었는데, 아기의 얼굴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아기는 저를 보고도 아주 오랫동안 만난 사람처럼 웃고 또 웃었습니다. 이제 그만 웃을까 하면 또 웃습니다. 지금도 그 아기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 아기를 입양한 후 그 가정에 우울증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기가 누구를 보아도 웃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태어난 지 3개월 밖에 안 된 말도 못하는 아이가 어디서 그런 표정을 배웠을까요? 누가 가르쳐줬을까요?

때로는 사람보다 개가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는 주인이 오면 무조건 꼬리를 칩니다. 개는 주인에게 한 대 맞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와서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분이 나쁘면 휙 돌아섭니다. 어떤 모습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까요? 어떤 모습이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줄까요? 어떤 모습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에는 분명히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짊어진 예수님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새싹과 같이,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싹과 같이 자라났다. 그는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품이 없었다.”(2절)

어쩌면 우리 교회의 모습, 성도들의 모습이 세상에서 그렇게 비춰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너무나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교회가 커지면 힘이 생기게 되고,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잘못 쓸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하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마저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3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거절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나중에는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무자비하게 꺾어버렸습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납니다.

저는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는 말씀이 귀에 쏙 들어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세계적으로 병을 잘 고치기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한번은 저를 만나서 ‘하 목사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그 사람의 병이 낫지? 그런데 자기를 위해 기도하면 병이 낫지를 않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고 했더니 ‘나하고 똑같군’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원하지 않는 병을 짊어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이 나의 아픔을 알까? 잠을 못자는 것을 이해할까?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을 이해할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항상 병을 갖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마저도 예수님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생이었습니다. 열두 제자가 있고, 여러 여인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보면 늘 이렇게 외로우셨고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호산나, 호산나’하며 찬송을 부르던 입술들이 사람들의 사주를 받고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고함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병을 짊어진 것은 그분의 병이 아니라 우리의 병을 짊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아픔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의 아픔을 대신해서 가져가신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받은 고난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4절)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고난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주무시기도 하고, 식사도 하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이 십자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에 끝까지 아무 변명도 하시지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랑받지 못했던 마음, 상처 받았던 마음을 다 씻어 주시려고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의 죄와 병과 고난을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상하게 했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5절)

우리는 이것을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눈물이 없었고, 애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고난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시고 우리의 절망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때 말이 없으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병을 고쳐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상처를 다 지우고 계십니다. 말 못할 고난의 문제도 다 치료하고 계십니다. 오늘 그 현장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6~7절)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예수님께 덮으셨습니다. 우리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추악함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다 덮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와 병, 절망, 공허함, 비참함을 다 가슴에 품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은총을 기억하며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