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 4월 21일_ 하용조 목사 십자가, 용서와 사랑

■ 4월 21일_ 하용조 목사

 

십자가, 용서와 사랑

 

여러분,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가 왜 능력이 있습니까?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더욱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영원성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

 

누가복음 23장 26~38절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께서 찾으셔서 제자로 삼은 사람,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을 만나 인생을 헌신한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구레네 사람 시몬은 마지막 종류의 사람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냥 예루살렘 시민으로서 여러 가지 소문을 들은 게 전부일 것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우연히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들도 놀라고 구레네 시몬도 놀랐습니다. 그는 ‘왜 저 사람은 신음 소리를 안낼까? 왜 저 사람은 아프다고 하지 않을까? 왜 저 사람에게는 억울한 표정이 없을까?’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져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을 보며 참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고 예수를 뒤따라가게 했습니다.”(26절)

예수님께서 너무 지쳐서 십자가를 질 수 없을 때 군인이 아무나 붙잡고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던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세상 말로 하면 그는 재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기 싫어한 죄인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을 전혀 만나 본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기억하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의 눈동자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서로 통성명도 못하고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겨받았습니다. 잠시나마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린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예수님 옆에서 수발을 들 수 있는 것도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듯 교회를 섬깁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교회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람이 에티오피아 내시입니다. 그는 광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는데 말씀이 해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해석을 요청합니다. 잠깐 동안 예수님의 해석을 들은 내시는 ‘아, 이분이 메시아입니까? 그러면 이곳에서 당장 제게 세례를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부자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고, 율법적, 종교적으로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청년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해보겠다고 작심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슬픈 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기어가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남자 속에 있는 치유와 구원에 대한 열정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입으로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내 입으로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자기 고백을 안 할까요?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대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적은 사모할 때 일어납니다

 

여러분, 대면하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선언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 먼저 결심과 작심이 있어야합니다. 이 소경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네 믿음대로 돼라!’

이 말씀에도 여러 가지 신비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기도도 하는데 왜 안 될까요? 우리의 믿음이 아직 안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꽉 찼는지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오면 도망갑니다. 힘이 들면 도망을 갑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서 도망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을 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믿음이 내 자리를 차지합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은 도망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눈을 뜨지 못하면 끝이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께 소리를 질렀고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돼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은 그냥 눈을 뜨니까 앞이 보였습니다. 기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믿음대로 너무나 사모했기 때문에 눈을 뜨니까 그냥 떠졌던 것입니다.

나다니엘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이 지나갈 때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왜 그가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많은 사람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자들은 예수에 대해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27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며 울었습니다. 가끔 예수님께서는 대한 영화를 보면 통곡하는 여자들이 줄지어 따라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시시한 문제로 울지 말고, 네 감정적인 문제로 울지 말고, 네 자신과 네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28절)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그때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하며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할 것이다. 나무가 푸를 때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나무가 마를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30~31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양이 영원히 빛날까요? 언젠가는 태양빛도 꺼질 것입니다. 지구도 영원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지구도 흔들릴 것입니다.

“죄수들인 다른 두 사람도 사형을 받기 위해 예수와 함께 끌려갔습니다.”(3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에게는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죄를 지어서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죄수도 하나는 그 오른쪽에, 하나는 그 왼쪽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눠 가졌습니다.”(33~34절)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34절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온갖 고초를 당하셨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셨을 때 그 고난의 응집된 표현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였습니다. 용서의 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심지어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다지. 자기가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라지.’ 군인들도 와서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라면 어디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적힌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35~38절)

여러분,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가 왜 능력이 있습니까?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더욱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영원성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이번 주도 십자가의 화해와 용서가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