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6일_ 조정민 목사 "싸움의 대상을 분별하라"

싸움의 대상을 분별하라
조정민 목사
신명기 20장 10~20절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면’ 평화롭게 화평하게 지내라 말씀하십니다.
큰 비전을 향해 다시 행진을 시작할 때에는 작은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집중하십시오.
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기준을 구하는 인생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공동체인 가족을 주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어제부터 우리는 밖으로부터 오는 공동체의 위협, 특히 전쟁에 대한 위협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에 관해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목적이지만 밖으로부터는 언제나 위협이 올 수 있고, 그런 위협이 올 때 우리의 대처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적과 싸울 것인가, 적에 대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맞서야 하는 것인가에 관해서 배웁니다. 우리는 싸울 대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모든 이와 화평하라
"너희가 한 성을 공격하려고 행진할 때는 그곳 백성들에게 평화를 제의하라.(10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왜 가나안 땅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심판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을 만나면 우선 평화를 제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 조건은 첫째 ‘그것이 가능한 일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위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맞으면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의 선을 넘게 되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아이디어입니다. 사람의 아이디어를 우상으로 만든 것이 ‘이데올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님과 말씀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이자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주의’, 모든 것이 평화로 해결된다는 주의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훈육이 없는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형상까지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축복을, 시련을, 고난을,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평화롭게,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내 손에 달려있지 않은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
"그러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그 민족들의 성에서는 숨 쉬는 것은 무엇이든 살려 두지 말라. 헷 사람들, 아모리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 히위 사람들, 여부스 사람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말이다." (16~17절)
때로는 우리가 살면서 영적 전쟁을 통해 이런 고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프지만 잘라내야 할 것들은 잘라내고 우리의 영생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움켜쥐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손에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 받습니다. 우리가 놓아야 펴야 가슴을 벌려야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놓으라고 하는 사인을 주시면 그 때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전을 주십니다. 비전을 주시면 우리는 작은 것들을 가지치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큰 비전을 향해서 다시 행진을 시작할 때에는 작은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온누리교회가 그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동안 우리가 비전을 향해 달려왔지만 알게 모르게 군살이 붙고 덕지덕지 무언가 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비전을 향해서 ‘Acts29’비전을 향해서 달려갈 때 우리의 군살이 되었던 것들을 제거하고, 쥐고 있던 것을 놓고 다시금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비전에 집중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나안 백성들을, 숨 쉬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이럴 때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사랑의 하나님인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긍휼이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진멸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또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산 간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간증들이 있습니다.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존재, 가치 없는 존재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고 단지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가던 걸음을 돌이켜서 뒤돌아 선 것 뿐인데 그것을 ‘의’라고 여겨주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버려 두었으면 끝을 보았을 인생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고난으로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 돌이키셨습니다. 그런 구원의 간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태에서부터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시시비비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우리와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은 높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뜻, 그 뜻에서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신만의 관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자기 신들을 경배하면서 하는 그 모든 가증스러운 짓들을 너희에게 따르도록 가르칠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짓게 될 것이다." (18절)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존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스려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백성들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땅을 만드시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세시고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계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어떻게 항의하고 대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뜻, 시각,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고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까닭은 내 세상이 아무리 크고 넓더라도 그것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 성경을 쓰신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이 옳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성경에 다 기록되어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이후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이후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과거, 미래가 한 시제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심판이 있더라 하더라도 심판도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이후에 미래가 있듯 전쟁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새로운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기준을 구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조유진 기자 ujin@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