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십자가와 자기부인(2일, 화요일 말씀)

 

마가복음 8장 34~38절

 

 

 

이재훈 목사

 

우리가 십자가에서 두 번째로 체험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는 체험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단계의 체험으로 이 단계는 반드시 첫 번째 단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체험을 하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6장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세 번째 단계의 고백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고백뿐만 아니라 죄인 안에 거하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단지 죽을 뿐만 아니라 죄인의 삶 속에 예수님이 거하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목표입니다.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님과 내가 함께 못 박힌 사건은 옛사람이 죽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나의 동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법적인 선언의 사건입니다. 반드시 두 번째 죽음이 따라와야 우리가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삶속에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결단과 순종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자아라는 무서운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엔 온통 나뿐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가 외부에서만 온다면 어쩌면 쉬운 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안이 온통 죄로 물들어있다는 것이 우리의 아픔이자 고민이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남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예배와 봉사와 섬기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자아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 속에서도 우리의 자아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열심히 섬기다가도 문제가 있으면 시험에 드는 나를 볼 때, 자아가 살아있는 것 아닐까요? 죽은 제물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영적훈련에 있어서도 그럽니다. 말씀과 기도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하는데 반대로 영적훈련조차 우리의 자아를 강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하는 말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의 모습에서조차 자아가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영적인 사역을 하면서도 우리는 나를 위한 예수님을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자아는 무섭습니다. 이 무서운 자아는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강해질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때 가장 강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는 강한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부인을 이루는 두 가지 방법

 

 

이럴 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패함과 사악함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옷과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해야 되는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자기부인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 없이 우리를 억지로 갈보리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로마서 7장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수없이 실패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러서는 로마서 8장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나의 자아가 살아서 계속해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있는데 우리의 십자가에는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못입니다. 못은 순종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못이 우리에게 박힐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 우리에게 순종의 못이 박힐 때에도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못이 나 자신의 십자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달콤한 삶이 아닌 고통스럽게 찌르는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못 박힌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몸은 죄로 인해 죽으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기 영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0~11).

 

이 말씀에는 ‘안에’ 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속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믿음의 삶을 체험하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일입니다. 가지에게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며 붙어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최고의 능력이자 인생의 비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지금도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 인생이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지막에 사도 바울처럼 ‘항상 그랫듯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마 ‘가끔 그랬듯이’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자기부인의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었기에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그렇고 항상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고난주간 동안만이라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는 인생을 결단하며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가 아닌 체험이 되길 바랍니다. 매일 경험하는 체험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가 우리 목에 걸린 장식이 아니라 내가 항상 매달려 사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행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사심으로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기자 onnuri@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