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온누리축제

주제강의 5 - 창조적 사역의 새로운 프레임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로마서 8장 5,6절을 보겠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의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창조적 사역의 새로운 프레임(frame)의 열쇠가 이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합니다. 우리는 다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은 생각의 주체가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립니다. 우리의 아이디어를 통제합니다.

사역은 안 되어도 고민이고 잘 되어도 고민입니다. 제가 서울 사랑의교회로 부임한 후 위임식 하기 전에 교우들에게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는 신(新) 3D업종 중의 하나입니다. 후임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신 3D업종이란 종합병원 원장, 대학총장, 대형교회 목사입니다. 특별히 대형교회 목사는 도덕적 책임감과 영적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더욱 힘듭니다.

저희 교회에는 매주 평균 장례식이 15번, 결혼식도 10번 정도 열립니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반복되어 정신이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사역에 대한 보람과 균형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굉장히 힘들어 할 것입니다.

아이디어가 계속 흐르는 영적 시스템

하나님께서 제게 전 세계를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세계를 다니면서 관심 있게 본 것은 각 지역마다 부흥하는 교회, 창조적인 사역을 하는 교회의 공통점입니다. 지역, 교단, 교회 크기에 상관없이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첫째, 이런 교회의 특징은 성령이 주시는 아이디어를 계속 나오게 하는 영적 시스템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은 조직이나 통제가 아닙니다. 역동적인 재생산이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채플의 지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척 스미스 목사님의 갈보리채플에서 하는 사역의 내용을 5년 쯤 집중해서 사역하면 2천 명 정도가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2천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원인을 연구해 보니 갈보리채플의 엑기스를 모든 교회가 재생산 구조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갈보리채플은 성경을 장별, 절별, 권별로 조직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갈보리채플은 성령사역에 민감합니다. 교우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성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습니다. 교회 행정 시스템 자체가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도운 것처럼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교회가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재생산 시스템의 핵심은 균형있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저울의 하나님이시요(욥 31:6), 참된 성도는 치우침이 없습니다. 과거 구약적인 개념에서 좌우로 치우치는 것은 배교를 의미하는 반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확고부동한 믿음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특히 사역자는 두 가지 성격에 균형을 맞춰 사역을 해야 합니다. 목양적인 사역과  예언자적 사역입니다. 목양적인 사역은 사람을 양육하고 필요를 채워주고 상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인, 창기, 과부 등을 목양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시대를 향해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교회도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가족적 기능, 훈련적 기능, 생산적 기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족적인 기능은 새신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족적 기능만으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군사를 키워야 합니다. 훈련적 기능에서 중요한 가치관은 헌신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도록 사역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효율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생산적 기능도 필요합니다. 잘 하면 보상하고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중 하나에 치우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내가 약한 부분을 보완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와 서구교회의 균형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많은 나라 중에 수천 년의 민족종교를 1백년 만에 바꾼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비행기에서 서울 하늘을 보십시오. 전 세계에서 십자가 네온사인이 가장 많은 곳이 서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한국교회의 장점은 열정, 헌신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탁월합니다. 헌신자들은 “더 드리고 싶지만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헌신합니다. 한국교회에는 고난을 이기는 신앙의 흔적이 있습니다. 고난과 헌신을 딛고 한국교회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서구교회의 장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정직, 성실, 합리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령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역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능력과 동시에 인격적 영성, 내면의 영성, 존재적 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선교적 영성, 나 자신을 추스르는 영성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영성이 균형을 잡게 되면 자신의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미 결정된 것으로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걸기 시작합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하는데 어떻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약점을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극복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의 생각을 통해 점점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또한 집중적이고 순발력이 있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럴 때 필요한 생각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런 기도에 도움이 되는 것은 기름부음이 있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이 약점으로부터 은혜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어제 교우들과 함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속에 찬양을 주셨습니다. 한국에 부임한 후 개인적으로 큰 기름부으심이 있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리 손에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주의 은혜 이곳에 가득해”

“나는 예수님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할렐루야! 이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부어주십니다.

살아있는 유기체인 교회

둘째, 창조적인 사역을 하는 교회의 특징은 교회론이 조직적 교회론이 아니라 유기적인 교회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시각과 관심이 교리적인 것이나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그런 교회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아원과 가정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고아원은 조직체입니다. 고아원에서도 잠을 자고, 밥도 먹습니다. 어떤 좋은 고아원에서는 가난한 집보다 더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고아원에 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얼굴을 보면 늘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유기체적 교회론과 조직체적 교회론의 차이는 교회가 직분으로 일하느냐 소명으로 일하느냐 입니다. 직분으로 일하는 교회는 조직체입니다. 소명으로 일하는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또한 일원론적인 교회인가 이론원적인 교회인가 하는 차이도 있습니다. 한국 크리스천은 흔히 신앙은 있는데 삶이 없다고 합니다. 이원론의 특징은 예배, 집회에서는 손을 들고 찬양하고 은혜를 받다가도 세상으로 나가면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왜 주일 예배와 당회가 같을 수 없습니까? 왜 기도회와 제직회가 같으면 안 됩니까? 제 친구 목사님은 당회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뛰어서 청심환을 먹고 간다고 갑니다. 그곳에서 무슨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겠습니까? 그곳에 세계를 품고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 역량이 커질 기회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유기적 교회론을 지향한다면 제직회, 예배, 당회, 훈련, 기도회, 공동의회가 같은 영적 흐름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성령님이 도우실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고백할 때 서로 의지하고 돕는 유기체가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론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주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16세기와 조금 다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정황은 온 천지가 모두 기독교였습니다. 문학, 건축, 예술, 문화, 정치 등 모든 것이 기독교로 통제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개혁자들의 우선순위는 이 타락한 기독교 문화, 정치, 사회 속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 거룩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자들의 모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요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따라서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정의는 50%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50%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보냄 받은 소명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 잡히면 유기적 교회에 대한 안목이 생깁니다.

에베소서 1장 22 ,23절은 교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첫째,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은 지역, 인종, 크기, 규모, 교단을 막론하고 교회는 영광스럽다는 뜻입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남들이 볼 때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주님이 교회와 함께 등장할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교회와 등장하시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얼굴에 빛나고,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으로 등장하십니다.(계 1:13~16) 요한은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 없어서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후(마 16:15~19) 변화산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마 17:1~8)

그 교회가 작은 개척 교회일지라도 교회는 영광스럽습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비가 새는 집에 살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교회에 영광이 있었습니다. 감히 범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일 저녁 집에 들어가 식사하면서 교회의 문제, 목회자의 문제를 비판할 만큼 교회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대형교회를 섬기지만 어릴 때 받은 찬양의 은혜가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게 하십니다. 세상 영광도 교회의 영광과 바꿀 수 없습니다.

모든 사역자나 교우들은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폄하하지 않고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창조적인 생각을 물 붓듯 부어주실 것입니다.

소명 받은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의 뜻 이뤄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몸이 필요할까요? 무엇 때문에 몸이 소중합니까? 몸은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몸을 입고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몸이 없으면 피 흘릴 수 없습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조적인 교회, 창조적인 교회가 되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아프면 일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아프지 않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치유사역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방사역입니다. 교우들은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늘 보호만 할 수 없습니다. 훈련을 해서 교우들이 스스로 먹고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병원의 기능도 하지만, 훈련소의 기능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실 때 반드시 인생에 금이 가게 하십니다. 어려운 환경을 주시고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어떤 작품도 고난 없이 된 것은 없습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는 두 종료가 있습니다. 환경이 어려워져서 받는 수동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 받는 능동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수동적인 고난을 받겠습니까, 능동적인 고난을 받겠습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훈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훈련을 통해 어떤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까? 많이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까? 동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까? 아니면 변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까?

저는 어릴 때 성경과 찬송을 많이 알았습니다. 우리 교단 외에는 구원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단 외 사람과 혼인도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많이 아는 사람, 교단이나 교회에 익숙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는 그의 지체입니다. 지체와 몸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지체는 몸을 떠나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교회를 떠나면 죽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체라도 몸에 붙어있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지체가 몸을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그 사람의 몸에 붙어있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해안선교, 내륙선교 등은 항해술과 내륙교통의 발달과 맞물려 있습니다. 역사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21세기는 전문인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갖고 내게 주신 은사대로 봉사하는 주역이 될 때 이 시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로 약점을 극복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균형적인 시각과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이 좋은 토대를 통해 부흥 축제에 참여한 모든 교회가 영적 재생산 구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정리 : 서철chol@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