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온누리축제

기본으로 돌아가자

무엇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쌓일 때까지는 버티지만 결국 무너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고 성장의 기본 원리를 지키지 않는 교회가 무한 성장을 거듭하리라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는 반드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흥의 첫 걸음 ‘철저한 회개’

기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 없이 한국교회는 다시는 부흥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알 것을 알려하지 않고, 구할 것을 구하려 하지 않고, 행할 것을 행하려 하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아니, 망합니다. 교회가 망하면 이 나라도 망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회개하면 다시 부흥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면 이 나라가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파워웨이브는 회개의 물결이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부실 신앙을 헐고 쓸어버리는 파워웨이브이어야 합니다. 회개의 물결이 한국교회를 휩쓸 때 한국교회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회개의 파워웨이브가 한국교회의 무지, 교만, 거짓, 위선, 사치, 허영 등 온갖 오물과 쓰레기를 쓸어갈 때 한국교회는 능력있는 교회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첫 발걸음이 회개라면 가야할 기본 자체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본 중의 기본은 믿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믿음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변화된 삶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고는 참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에 대해 많이 아는데 삶은 변하지 않는다면 올바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알 뿐만 아니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삶에서 신앙인의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삶의 변화란 삶의 의미, 목적, 방식, 기쁨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본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기본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기본이 없으면 그 위에 무엇을 세워도 헛일이 되고 오히려 많이 쌓을수록 더 위험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식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기쁨의 이유요, 유일한 원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이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에 기뻐하고, 함께 계시지 않는 것에 슬퍼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면서 슬퍼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일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바른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예전에 좋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의미를 잃고, 예전에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매력이 없어지며, 예전에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이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과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우리의 속죄, 구원, 생명, 기쁨,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예수님 안에서만 이것을 얻는 사람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택합니다.

참된 믿음이 삶을 변화시킨다 

누가복음 17:11~19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참 믿음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당시 나병은 단순한 병이라기보다 저주라고 여겼습니다. 그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 이상으로 크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토록 엄청난 은혜를 입은 나병 환자가 한꺼번에 10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 단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홀로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구원의 선언을 받은 사마리아인과 나머지 아홉 명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에게 인정받는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열 사람의 공통점은 첫째, 모두 같은 병에 걸려 비참한 상황에서 함께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두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가 일반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가가지 않고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외치기만 했습니다. 또한 나병 환자가 일반인들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깨끗해 졌다는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실 때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즉시 제사장을 찾아 떠났습니다.

 

셋째,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병이 나았다는 선언이나 그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는 약속도 없이 예수께서 대뜸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때, 이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선생님 먼저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셔야 저희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고쳐주신다는 약속이며, 말씀하신 대로 가기만 하면 낫게 될 것이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홉 유대인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그는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는데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 가던 길을 많이 가지 않았고, 그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자 지체 없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같이 가던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모진 질병과 고초를 함께 나누던 아홉 명의 동료에게 적어도 한번쯤은 같이 가자고 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쨌든 아홉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사마리아인 동료와 함께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 단지 율법의 명령을 철저히 지키려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나무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처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명분 뒤에는 예수님이 꿰뚫어 보신 다른 동기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확인과 선언을 한시라도 빨리 받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든 사회적 권리와 명예를 되찾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친구들과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나를 깨끗하게 해주신 그분, 나의 삶을 변화시킨 주님께 감사하며 그를 떠나지 않고 그와 함께 하는 것이 나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예와 즐거움을 되찾는 일보다 훨씬 귀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다섯 가지 모습

그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아니라 생명과 삶의 근원과 의미가 예수님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나의 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만나는 분이 아니라 나의 삶을 다해 따라야 할 주님으로 여기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변화가 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관이 함께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이러한 변화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뜻으로 여러 성경번역과 주석은 이 구절을 “네 믿음이 너를 온전케 하였다”고 옮기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란 단지 율법이나 성경의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홉 유대인들도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었기에 사마리아인보다 율법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께 믿음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믿음에는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뭘 믿는지도 모르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 참 믿음이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개입과 신비적 치유, 해결을 갈망하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만으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셋째, 예수님만 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며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만이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아홉 유대인들도 그 정도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무한한 능력과 지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전능자로 안다고 하는 것이 곧 온전한 믿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통상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졌다거나 기적, 신비스러운 일을 경험했다고 그것이 곧 참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물론 하나님의 신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신비를 체험하거나 방언, 통변, 예언, 치유 등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참된 믿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할 줄 모르고 특수하고 부분적인 은사만을 추구하거나 앞세우면서 자신의 믿음이 우월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참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첫째, 참 믿음은 신체적 치유, 세상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전인적 치유와 구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둘째, 참 믿음은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좋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셋째, 참 믿음은 나의 사회적 권리를 지키고 즐거움과 영광을 확보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기쁨과 영광을 높이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넷째, 참 믿음은 곤경에 처했을 때뿐 아니라 만사형통할 때도 언제나 변함없이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참 믿음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우선으로 우리 삶의 가치순위가 바뀌고, 삶의 목표가 변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 주 관심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의 일에 하나님의 힘을 끌어들이려던 계획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일에 내 힘을 바치려는 뜻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홉 유대인들에게서는 이 참 믿음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인에게서만 이러한 믿음과 삶의 변화를 주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과 삶의 변화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끊임없이 달라고 조리기만 하는 믿음으로부터 이미 받은 바를 깨닫고 감사하는 믿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살 것을 결단하라

한국교회는 그동안 이러한 삶의 변화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과 기쁨은 바꾸지 않고 믿음을 세상적으로 설정한 복과 인간적으로 세운 삶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보다 나은 수단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망친 기복주의입니다. 나를 주님께 복속시키려 하지 않고, 주님을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좇는 일에 관심 없고, 주님이 내 욕심을 따라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면의 병을 치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나의 성공을 가로막는 외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행하는 의지와 용기와 결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내세워 불의를 행하면서도 손해는 하나도 보지 않고 오히려 득을 보려 했던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로 모든 의식적인 죄를 쉽게 덮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내세우고 은혜를 의지하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온갖 불법과 부정을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온갖 불법이나 편법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결과 지상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과오요 중병이 된 것입니다. 이 과오와 중병 때문에 교회가 비리의 온상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도덕한 자들로 폄하된 것입니다. 이 과오를 시정해야하며 중병에서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바른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부실 신앙, 기본이 없는 신앙을 갖게 된 일차적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철저한 각성과 회개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돌아가야 할 기본을 일컬어 저는 ‘보통목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보통목회란 잘나지 않은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 안하고 욕심 없고 겸손하면 보통 목사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병은 보통목회자이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두 특별한 목회자, 잘난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잘난 목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초를 다져야 하는데 기초 다질 생각은 않고 목표만을 위해 나갑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떤 교회를 보기 원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가 보고 싶어 하는 교회는 초대형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지,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교인들이나 관심이 있지 세상은 관심 없습니다. 사회가 보기 원하는 교회는 보통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건한 예배, 바른 교육, 내실있는 선교, 겸손한 봉사를 묵묵히 힘쓰는 보통교회 말입니다. 큰 교회가 없어서 사회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이나 사업이 없다고 교회가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사회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회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으려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도와주지 않아도 되니 제발 너희나 잘 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통목회자가 필요한 때 

목회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회가 보기 원하는 목회자는 어떤 목회자 입니까? 겸손하고 사심 없고 언행이 일치하며 거짓말하지 않는 목회자. 못하면 못했지 불법이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는 목회자. 오직 신자들에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심어주며 참된 선교와 봉사로 이끄는 일에 생명을 걸고 묵묵히 힘쓰는 목회자. 아무리 크게 성장시켰어도 그것이 자기의 수고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고 여기며, 교회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요란스럽게 자녀에게 상속하려 하지 않고, 교회를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로 생각해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서 깨끗하게 손을 뗄 수 있는 목회자말입니다. 그런 보통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보통목회자는 민주적인 목회를 하는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들 대부분이 민주적인 지도자라기보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처럼 보입니다. 담임목사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고, 당회나 제직회는 맹목적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목회를 훌륭하게 하는 것이며 성공한 목회라는 생각이 대다수 목회자들의 심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집단이 교회라는 지적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인 악순환의 고리는 담임목사가 민주적 목회를 솔선수범해 실천해야만 끊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민주사회의 선도자이며 감시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민주화부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목회자는 초인적인 목회를 하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부교역자나 교인들에게도 초인적인 능력과 성과를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보통목회자는 인간적인 목회를 합니다. 보통목회자는 목회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조급함 때문에 교인들과 부교역자들과 자기 자신까지도 닦달하며 혹사하지 않습니다. 각자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하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항상 부족하게 여겨지는 자신을 위해 자기 연마와 재충전의 기회를 모두 갖도록 힘씁니다. 그런 보통목회를 추구하는 것이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다시 신앙의 기본을 생각하고 그 기본을 소홀히 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기본으로 돌아감으로써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정리 : 서철chol@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