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집회 3 비전터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클라이맥스는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지만 부활이 클라이맥스는 아닙니다. 부활 후에 승천할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십자가를 목격하고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고 다시 그물을 들고 옛 직업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마음에는 실패와 배신으로 인한 죄책감과 상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어부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떠나간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다시 찾으신 예수님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은 성령체험하고 은혜를 받아도 실수하고 뒤돌아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었다고 수없이 외치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알지 못한 좌절감과 절망과 실패와 상처를 안고 주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배우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기력증에 빠졌고 스스로 배신감에 상처를 받았던 제자들을 다시 찾았습니다. 최초로 나타나신 곳은 갈릴리 바닷가였습니다. 제자들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해변에 한 분이 서 있었습니다. 그분은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머릿속에 언뜻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한 번 들었던 목소리였습니다. 주님이 거기 서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주님!”하면서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뛰어갔지만 베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아시고 춥고 배고프고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해변에는 구수한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와서 고기를 먹어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청에 어쩔 수 없이 응답하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구운 고기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이렇게 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묻자 베드로는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있다가 주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세 번째 주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
저는 이런 주님이 무척 좋습니다. 배신하고 상처받아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한 때 헌신했지만 돌아선 사람, 한 때 생명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에 자기의 약함과 비굴함으로 스스로 상처를 받고 떠난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베드로를 만나자 마자 “너, 그럴 수 있니?”라고 했다면 베드로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실패하고 실수하고 떳떳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묻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에 베드로는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천국으로 가지 않고 세상에 남아서 제자들을 다시 만난 까닭은 무엇일까요? 회복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무너진 마음, 돌아올 수 없는 마음,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뛰어들지 못하는 베드로를 어루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40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첫 번째 보여주신 것은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만났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육의 몸과 영의 몸이 결합된 부활의 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가 입을 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무력한 제자들을 찾아가서 보여주고 만져주고 말씀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에 가까이 가지 못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 곁으로 가 주셨습니다. 끝까지 설득하고 찾아갑니다. 우리는 도망가면 찾아가고, 포기하면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던 도마에게는 손과 발을 보여주십니다. 저 같으면 “안 믿으려면 관둬라”고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찾아가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도마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비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불안, 죄책감, 의심, 갈등이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전하셨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평강을 전하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 목회를 끝내려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직장을 그만 드려는 분, 포기하려는 분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상이 있을지어다.”
둘째,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를 보내노라’입니다. “너는 포기하면 안 된다. 절망하거나 좌절하면 안 된다. 나를 보고 다시 살아나라. 일어나라. 너는 다시 떠나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너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이 예수님을 믿고 집회를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늙었다고 예외는 아닙니다. 나이 드신 분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부터 당신을 쓰실 것입니다.
셋째,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예수님은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이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생각하며 능력의 옷을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개인적으로, 집단으로 제자들을 만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목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대중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과 함께 하고, 연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주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났을 때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모으십니다. 16,17절을 읽겠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여기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왜 열 한 제자 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룟 유다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살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른 길로 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경배하나 의심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다 믿음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해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열 두 제자를 살펴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같이 충성스런 사람도 있습니다. 가룟유다같이 배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두 명도 이렇게 복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비전을 선포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어떤 영적 권위를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하늘의 권세란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땅의 권세는 창조의 권게입니다. 온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기적, 치유, 사랑, 회복 등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회색분자인 제자들에게, 어느 순간에 도망갈 수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비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전은 임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를 들었다고, 정보를 얻었다고 임신하지 않습니다. 비전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잉태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일단 잉태하면 아이는 자랍니다. 비전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를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 몸에서 아이가 자라듯이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것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고, 내 가치관과 철학을 만듭니다. 내 삶의 전부를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심방하고 다독거리고 회복시키신 다음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비전을 잉태시킵니다. 비전의 실체가 18~20절에 있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 저희에게 임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기 낳지 못하는 분은 잉태하길 축원합니다.
비전의 실체 4가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비전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가라는 것입니다. 기득권에,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안주하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비전은 그것이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기독교는 두 동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라'(come)는 것입니다. 주님께 와서 구원을 받고 회복되었다면 비전을 주시며 ‘가라’(go)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정처 없이 떠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떠남이 없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왕국을 만들고, 기득권을 누리고, 성취감을 가지려고 할 때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을 위해 떠나야 합니다.
둘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모든 열방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 삼으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훈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은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닮은 목사, 장로, 비슷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주님의 비전입니다.
셋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깨달은 것은 교회는 세례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세례까지 주어야 합니다. 임신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해산까지 해야 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는 것이 비전입니다. 내 직업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저는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다섯 번째 암수술을 받았기 때문의 의사가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CBMC(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 기독실업인회)에서 주관하는 제주 집회에 주강사를 맡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야 했습니다.
3,500명이 등록한 집회의 둘째 날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제주 실업인 700명을 초청했습니다. 1,000명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700명이 참석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새벽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중국에서 온 CBMC 회원 35명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몇몇 분들도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째 날에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순간,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교가 끝난 자리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을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이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집회를 마치고 중국인 7명에게 세례를 주려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종이컵에 물을 받아왔습니다. 그 물을 조금 넓은 접시에 옮겨 담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이 많지 않아서 아끼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에게는 7년 되면 부르는 곳으로 떠나라고 합니다. 기득권을 버리고 떠나십시오. 교회는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해야 합니다. 문화, 언어, 환경을 넘어서서 복음을 들고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비전입니다.
넷째,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저는 이 비전을 안고 가기를 축원합니다.
비전을 잉태하십시오
이번 축제가 지금까지 한 축제 중에 제일 좋았습니다. 어떤 분이 ‘오감만족’이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과 보는 것 등 오감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저는 식사 때 사람들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좋았습니다. 이번 축제 강의마다, 간증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비전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비전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이번 축제는 실패입니다.
이번 축제의 강의와 특강, 간증을 보니까 하나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나라. 회복되라.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너를 사용하신다. 비전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동일한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민족에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민족이 거듭날 것을 믿습니다.
어떤 때는 캄캄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우리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을 보니까 마치 에스겔이 먹구름 속에서 은빛 광채를 본 것처럼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이 비전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대로가 보이고, 희망이 보이고, 기적이 보이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잉태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가 변할 것입니다. 교회가 변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여, 이 비전이 내게 잉태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교회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사업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가정의 비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비전을 주시고 미련 없이 하늘로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여러분의 선교지입니다. 이 밤이 거룩한 밤, 축복의 밤이 되기 바랍니다.
오 주여, 우리의 영혼에 이 말씀이 잉태되게 하옵소서. 내 현실은 척박하고, 내 모습은 너무나 비참하지만 용기를 갖겠습니다. 희망을 갖겠습니다. 다시 기도하겠습니다. 이 비전을 붙들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