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신앙으로 물들다 – 전남 영광편 “우리는 살아서 말하고, 당신들은 순교로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서 말하고, 당신들은 순교로 말합니다”
가장 참혹한 순교 역사 가진 교회를 가다
전교인 순교당한 야월교회, 성도 2/3 순교당한 염산교회
서울 기온이 영상 4도로 겨울을 맞이하고 있을 때 전라남도는 아직 따뜻했다.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고 있다. 굴비와 천일염이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을 찾았다. 영광은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4대 종교의 문화유적지가 있다. 그중에서 기독교 역사가 가장 찬란하다.
영광의 기독교 역사는 크리스천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교회탄압은 심각했다. 당시 영광 지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탄압에 맞서 항거했다. 그렇게 신앙을 지키던 영광 지역 크리스천 194명이 순교했다. 갓난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순교당했다. 그 참혹함은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영광 야월교회는 전교인 65명이 순교했고, 염산교회는 성도 2/3에 해당하는 77명이 순교했다.
목숨과 신앙을 맞바꾼 선조들의 고백들이 가슴을 친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오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현대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 없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 순교의 피로 물들다
서울에서 320km 떨어져 있는 전라남도 영광은 차로 네 시간 거리다. 영광군 염산면을 지나다보니 ‘두우리 갯벌’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전남 영광은 굴비와 천일염, 보리새우(오도리새우)가 유명하다. 그 명성대로 곳곳에 젓갈판매소와 굴비직판장이 있다.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마을 입구에 ‘순교자의 길’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슴 아픈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 신앙 선배들의 순교지, 염산교회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다.
1939년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191번지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작고 아담했다. 설도항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한적한 바닷가 마을까지 피로 물들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지나 공산군들이 영광까지 들이닥쳤다. 공산군들에게 포위된 교회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당시 염산교회에서 시무했던 김방호 목사는 성도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몰래 예배를 인도했다. 같은 해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음에도 지방에는 공산군 잔당들이 남아있었다. 10월 7일, 영광군 염산면 지역에 남아있던 공산군들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잔혹하게 보복을 시작했다.
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 몸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죽창과 몽둥이, 칼로 찌르고, 때려서 죽이는 참상이 벌어졌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염산교회 성도는 전체교인의 2/3에 해당하는 77명이었다.
노병재 집사는 수장되면서도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양을 불렀다. 처절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공산군들은 김방호 목사 일가족도 바다에 빠뜨려 살해했는데 셋째 아들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김방호 목사의 셋째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전남 영광군 설도항 바닷가에는 기독교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백수교회, 묘량교회, 영광대교회 등 영광 지역에서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194명의 죽음을 기리는 뜻 깊은 조형물이다. 염산교회 내에도 순교기념관과 순교교육관이 자리 잡고 있다. 염산교회에 가면 ‘순교자의 길 체험코스’를 밟을 수 있다. 당시 성도들이 끌려갔던 길을 따라 순교현장을 돌아보고 찬양과 기도로 마무리하는 코스다.
순교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 ‘전교인 순교’
염산교회에서 5.5km 떨어진 곳에 이리마을이 있다. 차로 8분 거리다. 그곳에 야월교회가 있다. 염산교회와 야월교회는 한국교회 수난사에서 유례가 없는 경우다. 야월교회가 위치한 마을은 평화롭고 한적했다. 이리마을(야월)은 원래 섬이었는데 1960년대에 바다를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 그곳은 평화로운 섬마을이었다. 그 조용한 시골마을을 지키고 있던 작은 교회에 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2일, 이 지역에 정확한 인원을 알 수 없는 공산군이 상륙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기습을 알아챈 야월교회 성도의 제보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야월교회 전교인이 순교를 당한 사건은 계기가 되었다. 당시 9월과 10월 사이 공산군들은 야월교회 전교인 65명을 한명도 남김없이 살해했다. 직계가족 27명이 모두 죽임을 당한 가문도 있다.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임을 당해 대가 끊겼다.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했다.
염산면 오동리 출신으로 간첩이 된 김상룡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그가 고향에 공산군들을 데리고 와 더 많은 성도들이 죽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공산당들에 의해 산채로 매장되거나 수장되었다. 교회와 성도들의 집도 모두 불태워졌다.
한 교회 교인 전체가 순교의 제물이 된 사건은 기독교 순교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렇게 뿌려진 순교의 씨앗이 자라 이 지역 복음화의 모퉁이돌이 되었다.
사건 목격했던 어린아이가 교회의 장로로
당시 9살이던 최종한 장로는 예수를 믿지 않아서 참극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1960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영접하고 야월교회 초대장로가 되었다. 지금은 야월교회 순교기념관을 방문하는 성도들에게 당시 교회의 상황과 선조들의 믿음에 대해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그의 입술을 통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목숨이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도 선조들은 하나님을 놓지 않았어요.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야월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2005년 야월교회는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을 설립했다. 부지 7,603㎡(2,300평)에 교육관, 십자가 조각공원 등으로 이뤄진 2층 건물이다. 쾌적한 전시 시설에 알찬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2층에는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사진 전시실과 180석의 예배당이 있다.
순교박물관 한편에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의 시가 걸려있다.
“우리는 살아서 말하고 당신들은 순교로 말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고 당신들은 목숨으로 고백합니다.
(중략)
그날 당신들 침묵의 절규로 드린 거룩한 봉헌의 제물이여
저기 갯바람 소리 서해파도 소리로
그 고통 지금도 여기 들리고
오늘은 당신이 뿌린 피 제단에서 우리 같은 엉터리들도
이렇게 풍성한 하늘 복을 추수합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염산교회 내 위치한 순교기념관. 염산교회 순교사와 영군군의 기독교사가 안내되어 있다.
지난 2014년 한국기독교사적 제20호로 지정된 야월교회 순교지.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