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 – 경기도 화성 수촌교회와 제암교회
사진 1. 1987년 복원된 수촌교회와 현재 수촌교회(우)
사진 2. 제암교회와 제암교회순교기념관
나라사랑도 으뜸, 신앙도 으뜸
3.1운동 이후 벌어진 교회의 수난史
“4월 15일 오후, 일본 중위가 제암리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인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병사들은 내민 어린 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 제암리 학살 사건의 증인 전동례의 말 중에서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에서 광복된 지 어언 70년이다. 선조들이 일제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해 온 덕이다.
1919년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모든 민족이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 있었던 날이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본군은 더욱 무자비해졌다. 1919년 4월 5일부터 4일 동안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수촌교회 사건과 4월 15일 32명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교회 사건이 더 포악해진 일본군들의 만행을 알려준다.
지난달 26일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경기도 화성시 제암교회와 수촌교회를 찾았다.
제암교회 학살 및 방화사건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위치한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불리던 씨족 중심의 농촌마을이었다. 전체 서른 세 가구 중에 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에 3.1운동 이후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은 평화롭던 마을을 한 순간에 죽음의 마을로 바꾸어놓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암리 주민들은 민족저항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3.1운동이 벌어지기 전 제암리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 수원, 화성지역 민족운동세력들이 협력해 시위운동을 논의했다. 학생과 상인, 농민, 노동자 할 것 없이 이 지역 주민들이 3.1운동을 주도했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민족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한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들을 근절하기 위해 만행을 저질렀다.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는 3.1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 발안으로 이사한 조희창이라는 자가 일본경찰에 넘겼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인 사사카와 조희창이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왔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교회에 불러 모았다. 안종후 권사와 안진순은 교회 뒷문에서 도망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 군인들은 교회 안과 밖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다. 바람이 불자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다. 군인들도 마을을 두루 다니며 불을 질렀다.
조용히 묻혀버릴 뻔 했던 이 사건은 외국인들에 의해 알려졌다. 언더우드 선교사, AP통신 서울특파원 테일러, 스코필드 박사, 로이즈가 이 끔찍한 사건을 증언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냈다. 커티스 영사도 주한미총영사 앨런 버그 헐즈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제암리와 같은 학살을 당한 마을이 14개 군데나 더 있다고 한다.
제암리 뒷동산 묘소에는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엉켜 최후를 맞은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다. 불타버린 제암교회 자리에는 일본군의 만행을 속죄하는 일본인들이 보낸 성금으로 지어진 두 번째 제암교회가 세워졌다. 지금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제암교회가 다시 건립됐다.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번지(322-4)에 위치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 가면 당시 사건을 17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당시 교회의 유적 등을 볼 수 있다.
화성 일대 참극의 서막, 수촌교회 사건
제암교회에서 5km 정도 떨어진 장안면 수촌리 674-1번지에 수촌교회가 있다. 1905년 예배를 드리던 초가집 자리에 지금은 뾰족한 교회탑과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다. 좌측에는 초창기 수촌교회가 복원되어 있다. 태극기도 펄럭이고 있다.
수촌교회도 제암교회와 같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죄 없는 교인들과 주민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수촌교회는 1905년 김응태 성도의 주도하에 정청하의 집에서 7명이 모여 예배드리면서 시작됐다. 이후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전소되었다.
3.1운동 당시 김교철 전도사와 수촌교회 교인들은 마을주민들과 함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1919년 4월 15일 새벽, 일본군이 마을에 침입했다. 예배당을 비롯해 40여 가구를 불태웠다.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과 방화사건은 제암교회 학살 및 방화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다. 화성 일대에서 벌어진 참극의 서막이었다.
이 사건은 본래 수촌리가 속한 장안면과 우정면 지역 주민들이 벌인 시위에서 시작됐다. 4월 초, 수촌리와 인근 석포리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소 순경들이 주민들을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에 항거하며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경찰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항거하는 주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댔다. 그러던 중 실탄이 떨어졌다. 군중들은 더 크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실탄이 떨어지자 도망가는 일본경찰들을 향해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다 순사부장과 격투를 벌이다 흥분한 군중들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았다. 결국 가와바다는 순사부장은 목숨을 잃었고 군중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이 일로 말미암아 수촌리 일대에 가혹한 보복이 시작됐다.
일본경찰들은 가와바다 순사부장의 죽음에 화가 나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순사들은 무기를 들고 수촌리 사람들을 잡아갔다. 결국 수촌리를 시위의 진원으로 지목하고 네 차례에 걸쳐 혹독한 보복을 가했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수촌리 교회와 가옥 24채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2차 보복은 가옥을 수색하던 중 가와바다 순사부장이 짓밟혀 죽을 때 입었던 피 묻은 옷을 찾아내고 나서 시작됐다. 주민들을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 혹독하게 고문했다. 3차 보복은 4월 7일 수촌리를 비롯한 인근마을 꽃말, 용담골을 다니며 주민들을 밧줄에 묶어 몽둥이질 했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이 130명이 넘었다. 4차 보복은 4월 8일 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주민들이 도와주지 않자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수촌리 전체 40여 가구 중 36채가 불에 탔다.
신앙이 돈독했던 김의태 성도는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불타고 있는 교회로 먼저 달려갔다. 그는 불 속에서 교적부와 당회록이 든 50kg짜리 궤짝을 혼자 밖으로 꺼냈다. 그가 화재에서 건져낸 궤짝은 한국기독교 역사에 기념비적인 자료가 됐다.
수촌교회가 불타서 예배당이 없어지자 주민들은 1922년 4월 아펜젤러와 노블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초가 예배당 8칸을 건립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932년 수촌리로 이전한 예배당은 1987년 원래 형태로 복원 및 중건됐다. 중건된 수촌교회 주변에는 일제의 잔인한 보복을 세계에 알리고,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스코필드 박사 기념비와 3.1운동 독립운동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