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 한국여성 선교와 교육에 평생을 바친 ‘프라이 선교사’
그녀는 개척자이자 참 스승이었다
한국여성 선교와 교육에 평생을 바친 ‘프라이 선교사’(1868~1921)
“불쌍한 코리아. 이 끔찍한 날들이 언제 끝날지…. 어제는 내 생일이어서 동료들이 선물을 해줬지만 이 나라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리 즐겁지 않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박해받고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내가 끔찍합니다.”
한국여성 교육을 위해 생애를 바친 파란 눈의 룰루 E. 프라이(Lulu Edna Frey) 선교사. 그녀는 선교를 사명으로 붙잡고, 한국과 한국 여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일본의 지배 아래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보며 함께 슬퍼했다. 3.1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제자들 뒷바라지도 했다. 28년 동안 한국여성 선교와 교육에 힘썼던 프라이 선교사의 삶을 소개한다.
“여성들을 전도하고, 교육시켜야 한다”
1893년 10월 12일 금발에 파란 눈, 키가 큰 여성 선교사가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녀는 18세에 세상을 바꾸는 보람 있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프라이 선교사다. 그녀는 선교 잡지 <The Heathen Woman’s Friend>에 실린 ‘왜 그대는 가려고 하지 않는가’ 라는 글을 보고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미감리회 해외선교회(WFMS)의 파송을 받은 프라이 선교사는 스크랜턴 선교사와 함께 이화학당의 교사로 쓰임받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매일 6~7시간을 한국어를 배우는데 할애했다. 한국 아이들에게 성경 구절을 외우게 하거나 서양 동요를 부르게 하고, 한국인 교사에게 한글과 기초적인 한문을 가르치게 했다.
그녀가 한국에 왔을 당시는 청일전쟁 전야였다. 불안한 시기였다. 조선의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던 때라 사역 초창기에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1894년 6월, 요양하러 일본에 갔을 무렵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1895년 10월에는 왕비 시해사건과 왕 유폐 사건, 친일 내각에 의한 단발령이 시행됐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라이 선교사는 한국여성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들을 전도하고, 교육시켜 밝은 미래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혼인을 위해 팔려가거나 양도된다. 그녀들은 남자 형제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 그녀들은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
프라이 선교사는 페인 선교사와 함께 이화학당(지금의 이화여대)을 운영하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두 사람은 협력해 최초의 교과서 <젼테공용문답>을 발간했고, 미국 교과서 <자연지리학>과 <정치지리학>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매일통상기도와 주일예배를 생활화했다. 일 년에 한 번 부흥회를 열어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도왔다.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1893년 김정동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최초의 기도모임이 생겼다. 을사늑약 이후부터는 조신성 선생의 지도하에 학생들이 매일 수업 중간에 일정한 시간을 내어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을 가졌다.
1919년 프라이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녀는 떠나지 못했다. 만세운동으로 학생들이 구속되고, 교사였던 박인덕은 강의하던 중 체포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라이 선교사는 경찰들로부터 박인덕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서까지 동행했다. 그러면서 박 선생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면했다. 감옥에 있는 선생에게 깨끗한 이부자리와 사식을 넣어주고, 영치금도 줬다.
곧이어 수원 제암교회 방화 및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프라이 선교사는 일본군이 불태워버린 마을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5~6주 동안 머물면서 주민들을 위로했다.
프라이 선교사는 1921년 3월 18일 오전 6시, 밀톤 매사추세츠의 여동생 집에서 눈을 감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당시 미국 교포신문<신한민보>는 1921년 3월 31일자 신문에 “한국의 좋은 친구를 잃어”라는 기사를 게재하며 그녀의 공로를 기렸다.
프라이 선교사는 평생을 선교와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25년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했고, 나머지 28년은 한국여성 선교와 교육 사업에 바쳤다. 그녀는 한국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했다. 한국사람들이 조국을 되찾고 세계로 나아가 다른 민족을 위해 일하는 유능한 일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개척자이자 참 스승이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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