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조선의 바울과 자전거 탄 선교사

춘천중앙교회

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

 

춘천 기독교 역사의 숨결 ‘춘천중앙교회’

 

 

춘천은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던 땅이었다. 1897년 12월 8일 미국 남감리회가 강원도 선교를 결정하기 이전까지 말이다. 1898년 4월, 서울교회(현 광희문교회) 성도였던 나봉식과 정동렬이 춘천에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첫 예배를 드린 곳이 퇴송골(현재 남춘천파출소 자리)이다. 그 퇴송골에서부터 창립 100년이 넘은 춘천중앙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덕수 전도사와 춘천중앙교회

 

서울과 춘천의 거리는 100km다. 차로 1시간 30여 분 걸린다.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은 경치가 좋다. 좌우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기도 좋다.

춘천에 100년이 넘은 전통 있는 교회가 있다. 바로 춘천중앙교회(담임목사 권오서)다. 퇴계동 202번지에 위치한 춘천중앙교회는 춘천역과 춘천시내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1998년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성전’을 짓기 시작해서 2001년 지금의 퇴계동 건물로 이전했다.

“수고하고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교회 입구에 자리 잡은 ‘창립 100주년 기념교회 춘천중앙교회’ 비석 아래 적인 말씀이 눈에 띤다. 교회 한가운데 높이 솟은 종탑이 있고, 본관과 교육관, 뒤편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작게 꾸며진 이 공원에는 100주년 기념비와 이덕수 전도사 기념비가 있다. 교회 교육관 1층에도 이덕수 전도사의 이름을 딴 예배실 ‘덕수홀’이 있다.

이덕수 전도사가 누구일까? 춘천중앙교회는 이덕수 전도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1898년 나봉식과 정동렬이라는 사람이 춘천지역에 파송됐다. 그리고 3년 후에는 미국에서 로버트 무스 선교사가 춘천 퇴송골에 왔다. 그즈음 경기도 연천 고량포 출신 이덕수 전도사도 춘천으로 이주해왔다.

그는 춘천지역 선교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봉의산 기슭 언덕에 초가 예배당을 마련했다. 4칸짜리 초가집이었다. 그는 매일 지게 가득 성경책을 싣고 춘천 시내를 돌아다니며 전도활동을 했다. 그 4칸짜리 초가 예배당이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춘천중앙교회의 초석이 됐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이덕수 전도사에게 ‘조선의 바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언제나 성경책과 찬송가, 전도책자를 지고 다녔던 그는 ‘지게 전도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강원도 선교 개척과 발전에 기여했던 이덕수 전도사는 1910년 4월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과로 때문이었다. 춘천중앙교회 묘역에 위치한 그의 묘비에는 “주는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적혀있는데 그의 유언이다.

1902년 이덕수 전도사가 마련한 초가 예배당은 대관리(현 조양동)로 확장 이전했다. 1925년 마이어스 선교사(Mamie D. Myers)는 그곳에 ㄱ자 모양의 2층짜리 선교관도 세웠다. 1층은 유치원, 2층은 요리강습소와 성경공부방, 교육관으로 이용했다. 밤에는 야학교실을 열었다. 이 건물은 춘천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었고, 남자와 여자의 자리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어 지금은 사진으로밖에 찾아볼 수 없다.

춘천중앙교회는 1955년 미 감리회 선교부 병원으로 사용되던 벽돌건물을 인수해 교회 본당으로 사용했다. 붉은 벽돌로 된 이 건물은 교회를 이전 하면서 춘천시에 매각됐는데 교회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훼손하지 않고 지금은 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이콥 로버트 무스 선교사

 

조선 선교를 위해 춘천 땅을 밟은 파란 눈의 선교사가 있었다. 186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제이콥 로버트 무스 선교사(J. Robert Moose)다. 한국에서는 무야곱 선교사라고 불렸다.

그는 평범한 농부로 살 수 있었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가 택한 길은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영혼의 길’이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트리니티대학 신학부를 거쳐 선교사로 헌신했다.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메리 매그놀리아 더함 무스와 결혼해 같이 조선 선교에 나섰다. 그때부터 25년 동안 한반도 전역을 자전거를 타고 누비며 복음 전파를 위해 힘썼다.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춘천 퇴송골에 첫 속회(감리교에서 신도들이 구역을 나누어 모이는 기도회)를 조직했다. 이후 춘천지역의 교세는 매년 성장했다. 2년 사이에 사람 수가 30배 이상 증가했다. 세례 교인은 5배, 예배장소는 약 10배 늘어났다. 이런 성장에 힘입어 춘천의 위상도 점차 높아졌다.

1907년 말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이덕수 전도사의 도움을 받아 춘천 중심부, 강원도 관찰부와 춘천부가 있던 아동리와 대판리 일대 3만 5천여 평의 땅을 확보했다. 이 선교부지에는 병원, 학교, 예배당, 선교사 사택이 들어섰다. 병원 건물이 완공되자 1908년 9월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춘천지방회 감리사의 자격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그리고 또 복음 전파에 힘썼다. 로버트 무스 선교사의 아내는 여러 개의 여성 모임과 기도회를 만들었고, 4명의 부인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했다.

춘천중앙교회를 세운 장본인이기도 한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1907년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감리교신학대학교(당시 협성신학교)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구한말 체험기를 담은 <1900, 조선에 살다 Village Life In Korea>를 쓰기도 했다.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들을 야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책에는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며, 옛날 지혜만 나누는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모습과 딸이 태어나면 유감스러워하는 남아선호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나온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에는 조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서구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조선의 모습이 담겨 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1900, 조선에 살다: 구한말, 미국 선교사의 시골 체험기

제이콥 로버트 무스 저, 문무홍(등역), 푸른역사, 15,000원

 

 

구한말 이방인, 파란 눈의 제이콥 로버트 무스 선교사의 눈에 비친 시골 서민들의 삶의 풍경이 담겼다. 로버트 무스 선교사는 1890년 중반부터 20여 년 동안 자전거로 조선 전역을 누볐다. 그가 바라보았던 조선 사람들의 삶과 생생한 시골 풍경과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묘사되어 있다.

무식한 하층계급 출신이던 윤승균이 내 몸처럼 소중하게 다룾던 상투를 자르고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모습, 남아선호사상과 유유자적에 물든 조선 선비들의 삶이 서구인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재미있게 담겨 있다.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