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일본인, 마스도미 야스자에몬 장로

 

마스도미 야스자에몬 장로(1880-1934)

 

 

“제가 운영하는 이 학교는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제가 이 학교의 설립자로 있으면 결국 일본인 학교라는 소문이 나서 민족의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부안면 주민들이 직접 운영해야 합니다.”

전라북도 김제에 살던 일본인 마스도미 야스자에몬(富安左衛門) 장로. 그는 오산교회와 오산학당을 설립했다(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다름).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월간지 <성서연찬>을 간행할 정도로 한국인들을 교육시키는 데 전심을 다했다. 고향에서 운영하던 아버지의 간장공장을 정리하고 고국을 떠나면서까지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상촌을 세우겠다는 꿈

 

마스도미 장로는 1880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군에 징집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장교로 제대를 하고, 동경에 있는 와세다 대학을 다녔다. 그때 친구의 권유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가시노 아키코’라는 크리스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그때부터 조선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고 싶었다. 그가 조선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한일합병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일본의 많은 자본가들이 조선 땅을 매입하기 위해 군산항에 진을 쳤다. 마스도미 장로도 전라북도 땅을 향했다.

그는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에 땅을 매입해 농토를 개간하고 쌀을 재배했다. 봉월교회도 세웠다. 김제와 조금 떨어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도 땅을 사서 개간하고, 사과나무를 심었다. 1912년에는 하오산교회를 세웠다. 조선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흥덕학당’도 설립했다.

그는 혼자 힘으로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전라북도의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상경하여 기호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출신 김영구. 윤치병, 양태승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조선을 위해서라면

 

네 사람은 고베신학교에 입학했다. 마스도미 장로는 세 학생의 학비를 지원하면서 지도자 양성에 힘을 썼다. 모든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흥덕학당을 오산으로 옮기고 오산학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학당장은 양태승, 하오산교회는 윤치병에게 맡겼다. 김영구에게는 학교 사감과 주일학교 교육을 맡겼다. 이는 고창지역 최초 사립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오산학당은 이후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15명으로 이루어진 1학년생 학급을 편성하게 됐다.

그는 고베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활용해 조선 사람들에게 신앙교육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공부를 위해 <성서연찬>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사과농장을 운영하면서 얻은 수익금은 하오산교회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위해 투자했다. 하오산교회는 후에 오산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주민들 앞에서 오산교회와 오산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운영해야 된다고 주창했다. 그리고 1922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고창군민에게 기증했다. 고창군민들은 여기에 힘입어 고창고등보통학교도 설립했다.

고창고등보통학교는 1922년 6월 오산에서 고창으로 이전함으로써 오산고등보통학교가 개칭되었다. 1925년 고창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할 때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와서 축하했다. 마스도미 장로는 초대교장으로 부임했다.

마스도미 장로는 1934년 11월 6일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그의 장례식에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95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일본인 최초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