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1월23일 설교)

 

시편 139:1~24

/이재훈 목사

 

귀한 암송과 찬양으로 영혼을 깨워주셔서 감사한다. 24절 말씀 우리들은 읽을 때에도 몇 번 틀리는데 암송으로 완벽하게 은혜스럽게 암송해주셔서 감사하고 찬양 감사한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이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가장 무게 있는 분으로 보시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저 종교적 특색 중 하나로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보다는 세상에 문화, TV, 영화를 더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세금을 더 두려워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 우리의 생각 속에 만들어진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배울 때 하나님 안에 부분적으로 지식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폴 틀리라는 철학자는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너머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릴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상상하는 그 하나님 너머에 크신 하나님이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라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그런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139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몇 본문 중에 하나다. 20편을 통해 하나님의 무게를 영광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 심오함으로 봐서 다윗의 노년에 시대에 쓰여 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젊은 시절에 심오한 하나님에 관한 묵상을 적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고, 하나님의 감동이고, 하나님의 계시에 결과다. 인간의 어떠한 심오한 사상도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이렇게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완전한 거울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한 번도 대면해 본 적 없는 사람은 한 번도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과도 같다. 존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에 거울이 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24절 내내 가장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단어와 ‘나’라는 단어다. ‘주님과 나’ ‘하나님과 나’가 구절구절마다 반복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할 때 우리는 때로는 역사에 관한 어떤 지식, 때로는 어떤 상황에 대한 지식도 알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지식은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거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를 아는 지식 이 두 가지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말씀은 139편이다.

오늘 139편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다. 1절로 6절까지 말씀에서 다윗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다. 나를 아시는 그 하나님의 지식이 얼마나 깊은지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앉고 섬을 아시고, 우리 일상에 기본적인 행동, 앉고 일어서는 것,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앉고 일어서는지 우리 자신도 알 수가 없죠. 벌을 받다보면 군대에서 벌로 앉고 일어서는 것을 많이 시키죠. 그 때는 벌 인줄 알았는데 지금와 보니 운동시킨 것이었다. 운동인줄 알고 했으면 굉장히 즐거웠을 텐데, 그 땐 왜 이렇게 괴로웠나? 운동으로 시킨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벌 중에 몇을 했는지 카운터를 하지 않으면 오버를 했는지 앉고 서는 것도 카운터가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앉고 일어섬을 다 세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신다. 우리의 생각을 하루 동안에 무수히 많이 지나가는 생각, 잠시 지나가는 생각을 아신다.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모든 행위, 눕는 것,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어제 잠자리에 어느 위치에 누워있는지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신다.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우리는 말해놓고도 잊어버리죠. 기록에 남지 않으면 녹취되지 않으면 내가 말한 것도 잊어버리는 우리 자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모든 혀의 말을 아신다. 앞뒤를 둘러싸고 안수하신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아신다면 다윗만 아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신다. 사람만 아시겠습니까? 피조물의 모든 세계를 아신다. 시편 147편 4절에 보면 “4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이 수많은 별들, 우리는 몇 개인지도 관찰하지 못하는 수많은 별들의 수요를 세시고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름대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자가 발견해야 이름이 붙여진다. 때로는 탐사를 해야 그 태양계는 태양계, 은하계는 은하계로 그룹으로 이름을 붙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요대로 일일이 카운트하시고 그리고 이름대로 부르신다. 자연 모든 만물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세상에 헛된 신은 인간이 알려주어야 안다. 어떤 종교든지 신이든지 인간이 말해주어야 아는 것은 신이 아니죠. 진정한 신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야 진짜 신이죠.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신이신, 유일한 까닭은 성경 곳곳에 다 아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곳을 아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식을 가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 모든 사람들이 다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라고 했던 순간, 스쳐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나도 잊어버린 나를 알고, 내 무의식 속에 있는 나 자신도 하나님은 다 아시는 하나님이세요.

심지어 미래에 있을 일도 다 아십니까? 아시죠. 예지라고 하죠. 미리 아심.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전한다. 하나님이 있어야 될 것을 다 아신다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예지라는 단어 자체가 합당하지 않죠.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께는 과거나 미래가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에 자연 만물, 인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일 뿐이다. 신비로운 일이죠.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까? 아셨죠.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 망가트리거나 무너트리지 않는다. 그러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모든 일들을 아시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놨지만 인간이 타락하고, 어떻게 하지? 대책을 세우자. 그 때야 구원의 계획을 비로소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이 문제가 생긴 이후에 세운 대책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인간에 타락을 아셨고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미리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하나님의 지식이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반응해야 할까요? 한 가지만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지식이 나를 두렵게 합니까? 아니면 나를 더 힘 있게 합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면 그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거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를 힘 있고, 강하게 하고 능력 있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 늘 합당하게 사는거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죄를 아실뿐만 아니라 나의 억울함도 아신다.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아픔도 아신다. 나의 선행도 아시며 나의 의로움도 아신다. 세상은 억울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이 한 가지 사실이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소부재하심, 편재하심 그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7절 이하에서 그런 고백을 하죠.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는 이것은 피할 수 있다가 아니라 피할 수 없다하기에 강조하려고 의문문으로 바꾸어 질문하는거죠.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피할 수 없다는거죠. 내가 새벽 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내가 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저 음부에 스올에 내려갈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고 내가 어두운 흑암 속에 숨을지라도 낮과 같이 밝기에 나는 숨을 수 없다. 흑암이 나를 숨길 수 없고, 저 낮은 스올이 나를 숨겨줄 수 없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해본 적이 계십니까? 절대로 불가능하죠. 다윗은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해보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망할 수 없음을 그는 체험하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체험하고 있죠. 예레미야 23: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으로부터 누가 은밀히 자신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무화과나무 뒤로 자신을 숨겼죠.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이다.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거죠. 어떤 사람이 어느 책에보니까 “나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못 믿겠어.” “왜?”그러는지 물으니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자꾸 찾으신다.” 그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하나님을 왜 믿는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질문이 얼마나 유치한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죠. 아담 자신이 어디에 계신지 몰라서 묻는 것이다. 아담의 모든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이 학교 다녀와서 선생님이 무식해서 학교를 안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선생님이 나에게 모든지 질문을 하더라고 한다. 그것을 그 아이가 몰라서 질문하는거죠. 최고의 아이 교육법은 질문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질문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도 인간 자신의 질문이 많이 나오는 것은 최고의 지식의 비결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23:24절에서 보면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다. 공간적,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천지에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공간에 머무르셔서 공간의 제한을 받으셔서 그곳에 머무른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에 충만하다는 것은 천지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공간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뒤집어서 생각해야 된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 어느 철학자와 이야기를 하면 금방 넘어가버린다. 범신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공간 안에 있다. 하나님의 신을 모든 공간 안에 가두어 버리는게 범신론이다. 그렇게 유치한 생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힌두권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범신론에 묶여 있다. 소 안에도 신이 있고 달에도 신이 있고, 모든 물건 안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든 공간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다고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공간 안에 가둬버린 신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둬버린 범신론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사는지 모른다. 인류 가운데 가장 발전이 없고, 가장 인권을 무시하는 세상을 가면 범신론에 속한다. 비슷한 것은 이신론이다. 굉장히 발달한 사회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들어와 있는 이신론적인 사상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는 온 세상에 충만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지만 천지에 충만하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섭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신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기까지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실제를 떼어 버리는 것이다. 교묘한 사상이다. 거기에서 자연을 신으로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신 것은 맞지만 하나님은 자연에 충만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자체가 신이 되어버리는거죠. 과학은 발전했다. 자연 법칙은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견하는 법칙에 매여서 그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 지금도 충만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느 곳에 계시다고 무소부재 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충만하게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다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임재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거하고 땅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18:26 보면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어떤 피조물에게는 정의로 나타나지만 어떤 피조물에게는 은혜로 나타나시고 어떤 피조물에게는 영광으로 나타나는 임재하심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멀리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에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생각만해도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계셔서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거리를 두시지 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너무나 머리 내어버리는 거죠. 그것은 인간 상태에 따라 하나님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심지어 모든 사람에게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마음에도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사야 59장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낸 것은 우리의 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까닭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성품 상 영적인 거리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에 계신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심령에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그렇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 분의 다스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멀리 느껴지는 것이다. 여러분 어디에나 계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멀리 떨어져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닮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한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삶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시선만을 의식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하나님께로 도망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께 도망합시다.” 멋있는 말이죠. 도날드 그레이트 반 하우스라는 분, 돌아가신지 오래되셨지만 필라델피아 장로교회 목사님이셨죠.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때 그 때는 당신이 결코 가려고 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비용은 당신이 부담한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당신이 도망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로 나아가면 언제나 당신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모든 비용은 하나님이 부담한다.” “여러분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원하는 비용도 다 부담하고, 원하는 길로도 가지 못하겠습니까? 아니면 원하는 곳으로 가고 비용도 하나님이 부담하시는 길로 가겠습니까?” 어느 곳이나 계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고 그 비용도 다 지불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도망하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시편 139편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순서가 참 기묘해요. 먼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편재하심,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해가는 순서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라고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정직한 순서 인 것 같다. 하나님이 내 상황을 아실까? 아시죠.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실까? 계시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는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하심부터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무한하심부터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을 수 없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이해하고, 그리고 나서야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구나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뜻하신 모든 것대로 다 행하시다는 것이다. 아무런 제한 없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뜻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세요. 독단적인 하나님이실까요? 아니죠.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모든 것과 함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 독단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3가지 영역에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첫째는 창조, 둘째는 섭리하심, 셋째는 심판하심이다.

13-16절을 보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전능하심을 고백하고 있죠.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우리가 모태로부터 내 형질을 이루기 전에 나를 아셨다. 내 인생에 하루가 되기 전에 나의 모든 삶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를 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나를 아셨다는거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에 존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한 것부터 하나님이 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은 경험적 지식, 노력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다. 탐구해서 관찰과 경험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냥 다 아신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 전부터 형질에 이루기 전까지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아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인가?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여러분 주의 생각의 수,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면요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생각이 안 난다. 소히 딜레마에 빠지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항상 이 두 가지에 어떤 선택에 기로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길은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 하나님의 생각의 수는 기가 막히다는거죠. 여러분 우리가 내가 선택하는 그 무엇이 결정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수는 모래보다 많다. 내 수는 이 두 가지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도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선택하십시오. 딜레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것이든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꿔 하나님의 생각과 수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줄로 믿는다. 내 생각이 너무 많으면 그 자체가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믿음으로 단순하게 걸어가면 때로는 위험한 길처럼 보여도 가장 안전한 길이 될 것이고 때로는 안전한 길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멸망한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심을 믿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가운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 내 인생에 인도할 것이다 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보호 받을 줄로 믿는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심판하시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시니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죠. 악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악을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 하신다는 거죠. 여러분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아서 심판받지 않은 사람이 많죠. 하용조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죄인과 감옥 밖에 있는 죄인,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는 죄인이죠.” 그러나 세상에서는 드러났어도 증거 부족이면 죄인이 아니죠. 세상에서는 뻔히 아는데도 증거가 부족하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심판으로부터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악이라도 그냥 묵인할 수 없는 하나님, 이런 완전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놀라운 기도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다윗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어떤 고백을 합니까? 하나님 나를 살펴주십시오. 여러분 이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살펴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살피사.. 살피라는 것은 땅을 깊게 파서 땅의 지반이 나오기까지 파헤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청문회를 보면 너무 힘든 소식들이 나오죠. 그 분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한 번 파헤치면 기가 막힌 사건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파헤치지 않아서 그렇지. 저는 그렇게 파헤치는 분부터 파헤치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제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지나친 것도 문제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지식과 전능하심으로 나를 파헤쳐주십시오. 얼마나 겸손하고 담대합니까. 자신 있어서가 아니죠. 자신 있어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을 자신했기 때문에 나를 살피사, 내 뜻을 알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죠. 진짜 앞의 고백을 믿는다면 22절까지 고백을 믿는다면 이것은 살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가는 것은 당연한 고백이다. 하나님 나를 살피사 내 뜻을 아시고 그리고 나를 시험하사 내 속에 나도 모른 나, 정말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나를 좀 드러내주십시오. 하나님이 몰라서 시험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기 때문이죠. 내가 모르기 때문에 나를 좀 살피고 시험하사 나를 파헤쳐달라는 것이다.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게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라는 말은 있다는 것이다. “있나 없나 보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을텐데, 하나님 잘 봐 주십시오.” 그런 뜻이다. 이게 당연한 태도죠. 나도 모른 악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에 그런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까? 하나님 그러나 내 악한 행위를 잘 봐주십시오. 나의 악한 행위가 떠나게 해주시고 악으로부터 떠나게 해주셔서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왜냐면 악을 품고는 영원한 삶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죠. 영원한 길로 나가려면 악을 제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내게 분명히 악한 행위가 나 일텐데 하나님 그 악으로부터 떠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삶을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면서 그것을 나 자신의 삶으로 비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 모두가 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가운데 나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감으로 우리 인생의 길이 영원한 주님의 길이 되기를 축원한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