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주리고 헐벗은 사람 입혀주고 먹여주었다”
양반출신 거지대장 이보한(1872-1931)
“주모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요.”
“어디 사시는 분이요?”
“구만 리 창천이 다 그분 집이요.”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이보한은 1919년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어린 학생들 사이를 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순사들이 그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휘두른 곡괭이에 이보한이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종로경찰서였다. 일본 순사들은 그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취조실로 데려가 곤죽이 되도록 때렸다. 그때 이보한이 개 거품을 물고, 헛소리를 하면서 옷에 똥오줌을 싸버렸다. 취조실이 난장판이 되자 순사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며 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보한’에서 ‘이거두리’로
일본 순사들이 혀를 내두른 이보한은 기인(奇人)이었다. 그는 1872년 익산 목천포 양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보쌈을 당해 혼인을 하지 않은 채 그를 낳았다. 온갖 멸시를 당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구박을 못 이겨 도망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보한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계모 밑에서 자라며 서자(庶子) 취급을 받았다. 그가 열병을 앓았을 때도 방치했다. 그때 눈이 곪아버렸다. 그 이후로 그는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의지할 곳 없던 그를 큰어머니가 보살폈다. 홀로 살던 큰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큰어머니가 매일 자장가처럼 부르던 찬양이 있었는데 ‘거두리로다’였다.
이보한도 큰어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이 찬양을 매일 따라 불렀다. 사람들은 그를 ‘거두리’로도 불렸다. 전라북도 사람이라면 이보한은 몰라도 ‘이거두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보한은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를 따라 다녔다. 김 목사를 따라 다니며 선교사들에게 영어와 기독교 교리를 배웠다. 교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설교를 할 정도였다. 그가 전주 서문교회 아이들 앞에서 주일설교를 할 때 윗저고리를 던지면서 말했다.
“가난한 이에게 이렇게 벗어줘라.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불쌍하면 줘라.”
한평생 퍼주다 떠난 사람
이보한은 자신처럼 천대받던 사람들을 향해 나갔다.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은 배고픈 자, 천대받는 자를 향했다. 그는 스스로 걸인이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날마다 남문 밖 장터나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때로는 소금을 짊어지고 다녔다. 소금을 팔아 남은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이름난 지주들은 각종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다. 이보한은 그들의 사랑채에 드나들며 식량과 의복, 구호금품을 받은 대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나눠줬다, 그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는 한평생 돈 한 푼 모으지 못했다. 생기는 대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퍼주다 보니 자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거두리 이보한은 1931년 추석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전주의 걸인들과 나무꾼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걸인들이 상여를 붙들고 대성통곡했다. 그 행렬이 10리나 이어졌다. 나무꾼들은 나무를 팔아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거리에 비석을 세웠다. 120센치 높이의 비석이었다. 그들은 비석에 이렇게 적었다.
“평생에 성품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쳐 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혀주고 먹여주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