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역 기독교 전파 108년, 그 역사를 만나다
숭고한 그 이름 오정동 선교사촌, 국립대전현충원
올해로 대전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8년 되었다. 20세기 초 선교사들의 헌신과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 감리교와 성결교, 구세군, 장로교가 순차적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대전 인구수에 비해 기독교인 수는 적은 상태였다.
해방 후 불과 10년 만에 상황이 달라졌다. 1952년 대전지역 교회가 14개에서 58개로 늘어났다. 1960년에 들어서는 기독교인이 1만여 명으로 늘었다. 당시 대전과 비슷한 인구 규모를 가진 곳과 비교할 때 매우 큰 변화였다.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대전 지역에 여러 교육기관과 사회기관이 설립됐다. 감리교대전신학교(현 목원대)와 침례회신학교(현 침례신학대), 대전보육대학(현 배재대), 대전기독학관(현 한남대) 등 기독교 가치관에 따라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부는 1949년, 대전에 새로운 스테이션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대덕군 회덕면 오정리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그곳이 지금의 한남대학교가 있는 대덕구 오정동이다. 1954년 스테이션과 함께 한남대학교가 세워졌다.
3代째 이어온 못 말리는 한국사랑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133번지. 한남대학교는 서울에서 174km, 차로 2시간여 거리가 떨어져 있다. 한남대학교 정문에서 상징탑을 지나 200m 더 올라오면 왼편에 작은 공원이 보인다. 인돈공원이다.
‘인돈’은 한남대학교 초대학장이었던 선교사의 이름이다. 인돈 선교사(윌리엄 A. 린튼, 1891-1960)는 1912년 미국장로교회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 1956년 한남대학교 초대학장이 됐다.
“수업은 정시에 시작한다. 수업은 정시에 끝낸다. 모든 학생에게 과목마다 숙제를 내준다. 교수와 학생은 결강하지 않는다. 기독교 분위기를 유지한다.”
인돈 선교사가 부르짖은 말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말이지만 그는 이러한 교육관으로 48년 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인돈 선교사는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이었다. 또한 섬김과 나눔으로 본을 보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다. 해방 후에는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그가 한남대학교를 설립하던 시기는 암 투병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짓고, 대한민국의 국권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그의 아들(휴 린턴, 한국이름 인휴)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0년에는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워 결핵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손자는 2010년과 2012년 온누리교회 강단에도 섰던 유진벨재단의 스티브 린튼(인세반)이다. 구한말 파송된 선교사의 한국 사랑이 3대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0년 정부는 인돈 선교사가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남대학교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11년 개교 55주년을 맞아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은 학교 중앙편에 있는 공원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그곳이 바로 인돈공원이다.
동서양의 만남 ‘오정동 선교사촌’
대전 문화재자료 44호로 등록된 오정동 선교사촌은 한남대학교 내에 위치해있다. 1955년부터 1958년 사이 지어진 선교사 사택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지어진 북측의 세 개 동을 오정동 선교사촌이라고 지정했다. 사택 세 채 모두 붉은 벽돌과 한국식 팔작기와지붕, 서양식 조적조의 단층 ㄷ자형으로 지어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다. 인돈공원을 지나 오정동 선교사촌을 찾아가기 위해 안내책자를 뒤졌다. 학교 뒤쪽 숲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학교 가장 끝에 위치한 성지관 뒤쪽으로 안내되어 있었다. 숲 속에서 1시간30분여 길을 헤매는 우여곡절 끝에 한 학생의 도움으로 오정동 선교사촌을 찾아갈 수 있었다. 오정동 선교사촌을 방문하고 싶은 성도는 안내 책자나 표시를 의지하기보다 ‘인돈학술원’을 찾아가면 된다. 학교 정문보다 후문으로 찾아가면 쉽다.
선교사촌 내 주택 세 채 중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은 ‘린튼하우스’다. 인돈 선교사가 살던 집이다. 두 번째 집은 서머빌 선교사(John N. Somerville, 한국이름 서의필)가 살던 ‘서머빌하우스’다. 서머빌 선교사는 1954년에 한국에 와 1994년까지 한남대 교수로 사역했다. 그는 안동 권씨 족보연구로 1974년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학 전문가다. 서머빌하우스는 지금은 한남대 인돈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집은 ‘크림하우스’다. 1952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된 크림 선교사(Keith R. Crim, 한국이름 김기수)가 살았다. 미국 브릿지워터대학과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를 나온 그는 1952년부터 1966년까지 한남대와 장신대에서 강의했던 구약학자였다.
대전에서 만난 아름다운 믿음의 선조들
한남대학교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국립대전현충원이 있다. 1985년 11월 13일 문을 연 국립대전현충원은 전체 면적 약 322만㎡(97만 4천 평)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경찰관묘역, 사병묘역, 애국지사묘역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모두 3개다.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안장되어 있다. 약 1,760여 기의 묘지 중 228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애국지사 제1묘역에는 44명, 제2묘역은 137명, 제3묘역은 47명 정도다. 제2묘역-393의 주남선 목사와 제2묘역-1015의 엄주신 장로 묘지를 찾아가 보았다.
주남선 목사(1888-1951)는 19세기 후반 민족적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 경남 거창읍 동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기 중반 일제 침략시기와 해방 정국에서 활동한 목회자이자 애국지사, 교육자다.
그는 진주의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한 뒤 1919년 거창읍교회 성도들과 함께 3.1 독립운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조선국권 회복단과 독립군 서로군정서에서의 모금활동을 하면서 줄기차게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거창지방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1년 거창읍교회 목사로 부임해 그 곳에서 평생 목회활동을 했다. 1950년 6.25 사변 때도 그는 거창읍교회를 목숨 걸고 사수했다. 성도 대부분이 피난을 갔지만 그는 폭격 속에서도 기도와 심방을 하면서 교회와 남은 성도들을 지켰다. 결국 공산당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 후유증으로 1951년 3월 23일 63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엄주신 장로(1890-1973)는 1890년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태어났다. 1931년 세례를 받고, 이듬해부터 한의사로 일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나 환자들이 몰릴 정도였다. 1919년 3월에는 손종일 장로(손양원 목사 부친)와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약봉지를 만든다는 핑계로 문종이를 대량 구입했다. 그것으로 태극기를 제작하고 칠원읍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 일로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엄주신 장로는 1924년 칠원교회 예배당을 지을 때 아름드리 버드나무 40주를 교회에 바치고 성전 재목으로 사용하게 했다. 1933년 장로 장립 이후에는 한학자로 주일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가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면 성도들로 교회가 가득 찼다고 한다.
그의 생활철학은 하나님 제일주의였다. 하루의 첫 시간은 무조건 새벽기도로 시작하고, 집에 와서는 가족들과 아침가정예배를 드렸다. 농사를 돕는 일꾼들도 아침가정예배 후에 일을 시켰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한의사였다.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돈을 받으면 그 중에서 깨끗한 돈을 골라 십일조 함에 넣었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일에는 읍내 유지들을 불러 모시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40여 년 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던 엄주신 장로는 1973년 8월 28일 하나님 품으로 떠났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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