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_부산

 

조선의 관문 부산, 경남 기독교 발양지 되다
부산지역 3.1독립만세운동, 구국기도회 거점

 

구한말, 부산은 조선의 관문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첫 기착지였다. 1884년 알렌,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딘 곳도 부산이다. 이들은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 서울, 평양, 원산 등지로 갈 수 있었다. 구한말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의 첫 기착지,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가봤다.

 

한강이남 최초교회 ‘초량교회’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2시간 40분 걸려 도착한 부산. 바닷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매섭다. 오늘 목적지는 부산역 맞은편 언덕배기에 있는 초량교회다. 부산의 기독교 역사를 논할 때 초량교회를 빼놓을 수 없다.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다. 미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암 베어드(William M. Baird, 한국명 배위량)가 세웠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2년 4월 영선현에 선교사 사택을 짓고, 사랑방을 예배처소로 개방해 선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랑방 전도가 11월 영선현교회로 발전해 초량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영선현교회는 이후 영주동교회, 초량3.1교회, 초량교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발전했다.
부산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초량파출소를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니 초량교회가 보였다. 언뜻 보기엔 여느 교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교회 2층에 위치한 역사관을 둘러보면 초량교회의 역사와 자부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역사관에는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내외의 자료를 비롯해 초량교회의 역사, 당회록과 교인명부, 회계장부, 역대 담임목사 연표 등이 전시돼있다. 주기철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의자도 눈에 띄었다. 주기철 목사는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초량교회에서 시무했다.
초량교회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세가지다. 첫째는 앞서 설명했듯 미북장로회 선교사가 세운 한강이남 최초의 교회라는 점, 둘째 신사참배 반대 및 독립운동의 영남지역 거점교회였다는 점, 셋째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국에서 모여든 목사와 장로들의 구국기도운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이 구국기도운동의 기적적인 열매라고 믿고 있다. 부산지역 선교와 복음화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해온 초량교회의 역사를 둘러보기 위해선 예약필수다. 안내하는 장로의 생생한 설명은 덤이다. (문의: 곽원섭 장로 010-7278-5015)

한강 이남에 최초로 세워진 초량교회의 현재 모습

한강 이남에 최초로 세워진 초량교회의 현재 모습

초량교회 역사관

초량교회 역사관

 

부산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요람, 일신여학교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부산선교 첫 순교자)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부산선교 첫 순교자)

 

두 번째 목적지는 초량교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산진일신여학교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좌천역 3번 출구로 나와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부산진교회, 일신기독병원과 함께 있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다. 마침 청주제일교회 청년회에서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기념관을 관리하는 부산노회 직원의 친절한 설명을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일신(日新)은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뜻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지은 이름이에요. 이곳은 부산지역 최초의 3.1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난 역사적인 곳입니다.”
일신여학교는 부산선교를 위해 조선을 찾은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다. 첫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 부산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서울에서 잠시 한국어를 배운 그는 부산을 선교지로 정하고, 1890년 4월 4일 부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오는 무리한 여행으로 인해 도착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 품에 안겼다. 현재 부산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복병산 기슭에 묻혔다.
고작 하루 남짓 머문 데이비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씨가 됐다. 호주장로교회는 데이비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한국선교를 후원하게 된 것이다. 1891년 10월 맥케이 목사 부부와 미혼 여선교사 3명(멘지스, 페리, 퍼셋)이 부산을 찾았다. 이들은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했고, 이는 한강이남지역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동래여고 전신)로 발전했다. 무엇보다 이 학교가 의미 있는 이유는 부산지역 최초의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라는 점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여교사들과 어린 여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주역이다. 이들은 밤새도록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좌천동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교사들과 학생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너무 대견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
당시 학생신분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제7회 졸업생 김반수의 증언이다.
건물은 현재 기념관으로 이용 중이다. 호주 선교사들의 노력과 어린 여학생들의 민족사랑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 되고 있다. 맞은편에 위치한 부산진교회 로비에 마련된 사료실도 볼만하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 문의 : 051-635-7113)

부산진 일신여학교 기념관

부산진 일신여학교 기념관

일신여학교 3.1만세운동 기념비

일신여학교 3.1만세운동 기념비

 

예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마지막으로 복병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물어봤다. 복병산은 데이비스 선교사를 비롯해 베어드 선교사의 딸 낸시 로즈, 미국선교사 찰스 어빈 등이 묻힌 곳이다. 부산 선교역사에 있어서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기대에 부풀어 있는 기자에게 돌아온 대답은 씁쓸함 그 자체였다.
“아쉽게도 개발하면서 묘지가 다 유실됐어요.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함이 이런 창피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복병산 기슭은 초기 선교사들과 가족들의 묘역이 가장 먼저 조성된 곳이다. 그런 곳이 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단다. 안타깝고 창피했다. 그들은 머나먼 낯선 땅에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자신들이 묻힌 묘역이 포클레인으로 갈아엎어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목숨을 걸고 이 땅에 온 수 많은 선교사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을 지켜본 제임스 게일은 데이비스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오전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데이비스를 묻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그는 여기에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흔적은 없다. 그러나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잠들어 있을 뿐이다. 부산을 통해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선교사들의 얼은 세계2위 선교대국, 개신교 비율 22%라는 놀라운 결과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항을 바라보며 상상해보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잠든 그들의 영혼이 깨어나는 모습을 말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