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1월24일)

 

시편 145:1~21

 

/이재훈 목사

 

할렐루야! 오늘 40일 송구영신 새벽기도에 마지막 날이다. 40일 기간을 정하는 것은 습관을 바꾸는 과거의 성품을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우리의 혈액도 3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피가 생겨 변화하듯이 우리 피부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새로운 피부를 덧입듯이 우리의 머리털도, 몸도 변화가 있듯이 영혼도 옛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입을 줄로 믿는다. 40일 이라는 기간이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인 수련회의 기간이 되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친밀히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연습한 것이죠. 그렇게 매일매일 일평생 주와 동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145편은 머리말이 다윗의 찬송시라고 되어 있다. 다윗의 시라고 해도 될텐데 다윗의 찬송시라고 덧붙여진 것은 145편이 유일하다. 그것은 찬송시의 어떤 모범, 표준이다. 가장 바람직한 찬송이라고 덧붙여 준 것이다. 146-150편까지 보면 모든 시편의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 145편이 찬송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찬송시의 서론 역할을 하고 아주 중요한 내용을 보여주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시편이 된다. 찬송시라고 할지라도 간구나 교훈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인데 145편의 대부분이 순수하게 찬양하는 찬송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과 기도 가운데 많은 기도 제목이 있지만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많은 기도의 내용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구하지 아니한 것, 꼭 필요한 것, 있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챙겨주실 줄로 믿는다. 이렇게 꼭 필요한 것을 가지가지 공책에 써가면서 내게 있어야 될 것은 빠짐없이 챙기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빠짐없이 기록하면서 챙겨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간구와 기도제목은 노트에 빽빽하지만 찬송과 감사의 제목은 빈약하다면 물론 하나님은 그런 기도제목에도 응답하시지만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내 필요한 것 구할 것 많은 것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순수하게 찬송하고 예배하고 감사하는 일들을 먼저 앞서 더 많이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든 영혼들에게는 그 모든 것, 구하지 아니한 것 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 믿는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 예전에도 이러한 비유를 했었죠. “P.H.D를 (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 학위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Praise Him Daily 매일매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신학박사를 Doctor of Theology라고 한다. 하늘나라의 P.H.D는 Thanks Him Daily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DA 학위는 거듭남, 그것이 학사 학위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매일매일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신앙의 학위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21절로 되어 있는 145편은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는 예전에도 몇 편이 그런 편이 119편 등 여러 시편들이 가나다라마 또는 ㄱㄴㄷㄹㅁ의 언어의 순서대로 만든 것이다. 언어의 제약이 분명히 있다. 많은 자음 중에서 알파벳 중에서 거기에 맞는 단어로 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언어적 제약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제약을 묶어 놓음으로서 암송하기 쉽다. ㄱㄴㄷ이 순서라면 암송하기 쉽다. 그러므로 알파벳 순서대로 만들어진 것일수록 중요한 것이다. 더 암송해야 한다. 더 반복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적 제약이 있지만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더 풍성하게 더 시적인 기교 뿐 아니라 내용조차도 풍성하게 우리말 성경, 다른 번역에서도 느낄 수 없는 풍성함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오늘 1-2절 말씀은 히브리 시편의 1-2절이 전체 내용을 포괄하는 선언과 같이 핵심과 같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최고의 찬송의 모범이죠.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이것이 찬송의 본질이요 찬양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왕이신 나의 하나님, 이렇게 고백하는 다윗은 어떤 신분의 사람입니까. 왕이죠. 왕으로 일하는 자가 자신이 진정한 왕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왕이 계시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 당시 왕권 시대에 왕이 곧 법인 것 같은 세상에서 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다’라고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한 사람이죠.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릴 적에 부르실 때 그의 인생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가운데 다윗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이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물론 허물이 있었고 죄가 있었고 여러 가지 아픔이 있었지만 다윗의 전 인생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택하셨는가, 다윗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그러한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이 단한가지 이 사실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나의 왕이시다 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고백이다. 모든 나라에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악인이라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나의 왕이시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때는 이 고백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심지어 왕인 자 일지라도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라도 자기가 있는 위치가 자신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라는 것, 진정한 권위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삶이 소중한 것이고,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소유한 소유격이 사용되어 있지만 이때의 소유격은 내 것, 나의 물건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내가 다스림을 받는 내가 섬기는 내가 예배하는 분이다’라는 뜻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분의 하나님, 훌륭한 간증을 하는 분의 하나님, 위대한 손양원 목사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는 일, 그 일이 바로 시편을 통해 연결되는 일, 그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그것이 모든 시편에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백인 것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이 우리에게 일평생에 이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잘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고백부터 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 고백만 하나님 앞에 먼저 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때로는 찬양을 부르십시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를 하며 하나님이 왕이심을 내가 높이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도의 문도 열어주시고 우리의 인생에 풀리지 않는 많은 숙제들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다. 그 왕이신 나의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되는 높이는 태도는 하나님은 우리가 높여 드려야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높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찬송을 해야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찬송하지 않아도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지 않아도 위대하신 분이다. 우리의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기 때문에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 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우리말에는 영원히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 언어로 보면 영원히 앞으로도 항상, 레올랍, 영원히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단어가 붙는다. 영원히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해야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기도하죠.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기도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눈 감고 지금은 집중이 되니까 눈 감고 기도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는 눈과 눈을 마주대고 진짜 하나님과 대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간구와 기도, 때로는 구름 잡는 것같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고, 헛된 것을 구하고, 방향 없는 기도를 했던 그런 기도는 더 이상 안 해도 될 때가 온다.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된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은 천국에서는 더 이상 소용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니까, 말씀이신 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전도한다. 천국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전도다. 대상자가 있어야 전도를 하죠. 이 세상에서 열심히 해야 되는게 전도다. 그런데 찬양은 이 세상에도 찬양하지만 영원토록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찬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찬양을 잘 연습해야 된다. 단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훈련을 잘 해야 천국에서 낯설지 않는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래서 교회 예배가 중요하다. 그래서 어느 교회 예배가 지루하고, 답답하고, 아주 하나님을 찬송하는게 아니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한다면 그 지겨운 찬양을 영원히 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 그 지루한 예배를 계속해야 한다면 천국은 지루한 것이구나, 그렇게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다. 진정한 찬송, 진정한 예배는 지루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그것은 지루하지 않다. 한 사람을 높이면 잠깐 높이는 것은 이해한다.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것, “그 사람 참 대단해. 그 사람 참 훌륭해.”라고 하는 것처럼 심지어 손양원 목사님도 앉혀놓고 그 사람만을 놓고 계속 칭찬하면 아마 손양원 목사님도 “그만 좀 하라”고 일어날 것이다. 손동희 권사님이 그러셨다. 기념사업하고 너무 하니까 그 분이 우상숭배 했다고 싫어 하실텐데 라고 말이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한 시간,두 시간 칭찬하면 반발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만 좀하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일은 아무도 지적하고 반항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찬양하라고 할 때 그만 좀 하라고 됐다고 그렇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찬양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칭찬도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몇 마디 칭찬은 괜찮지만 계속하면 칭찬이 아니라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칭찬은 정해져있다. 덕을 세우는 일, 겸손한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된다. 격려의 차원을 벗어나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찬송은 찬양이란 하나님을 칭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감히 하나님을 칭찬합니까? 피조물 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칭찬한다고 하나, 그래서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어제나 오늘 영원토록 계속되어도 당연한 일이고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다. 사람을 높이면 마음에 시험이 들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면 마음에 큰 기쁨이 온다. 그러므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높이고 영원토록 송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이 시는 3절 이하에서 왕이신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해야 될 이유를 설명한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많은 이유들이 있다. 논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반복해서 읽다보면 나타난다. 첫째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왕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 분의 행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지, 얼마나 큰일인지, 얼마나 광대하신지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두 번째 중요한 내용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은혜로 긍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제가 교차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산문이나 논리적인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글들은 단락이 분명해야 된다. 이 전에 말하고 있는 주제와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가 교차하면 잘못된 글들이다. 시는 그렇지 않다. 시의 자유로움은 앞서 말한 주제가 다음, 다음에서 또 나오고 또 나와도 혼합되어 나와도 보이지 않는 산만한 것 같지만 숨어있는 것이 시의 느낌이죠. 그래서 주제를 보면 3-6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니 찬양할 것이다.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6절에서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7-9절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찬양한다. 7절에서 그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며 8절에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9절에서 그의 긍휼을 베푸시는 도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심을 찬양한다.

10-13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간다. 10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나라와 영광을 말하며 12절에 보면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13절에도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의 나라의 영광, 주의 위엄과 주의 영광을 송축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14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교차적으로 반복해서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 다윗은 이 찬송 시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할 때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물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 하나님의 많은 위대하심 가운데 가장 위대하신 중에 위대하심을 손꼽아 노래한다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긍휼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이 왜 위대하신가, 만물을 통치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는데 그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가장 많은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데 더 힘쓰시는 하나님, 본문을 읽어보면 멸하시는 것은 딱 한 구절 등장한다. 20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사실 얼마나 간단한 것입니까? 멸한다는 것은 어떻게 멸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악인은 어떻게 멸하는지에 대해 시를 나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나열하며 고백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악의를 멸하는 악의를 공의대로 멸하는 위대하심보다 악을 참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선을 베푸시며 은혜와 긍휼을 한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해지려고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닮아간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만을 닮아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사용하신다. 내가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은혜를 베푸는 선한 인생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하신다.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어떻게 찬양합니까?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 “4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이것은 물리적인 소리다. 그냥 생각 속에 큰 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는 하나님의 위대하심만큼 찬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 작은 소리로 읊조리지 않는다. 찬송은 아주 큰 소리로 불러야 된다. 하나님 앞에 입을 벌리는 것 자체가 찬양이다.

작은 소리도 읊조리라고 되어 있다. 5절에 보면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이것은 홀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홀로 조용히 묵상하며 읊조리는 것도 있다. 너무나 감동받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대단하심을 혼자말로 속삭이듯이 송축하는 것도 하나님은 받으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균형하시는 분입니까? 큰 소리로만 찬양을 받으시고 작은 소리의 찬양을 안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지만 홀로 조용히 묵상하며 하나님을 읊조리며 묵상한다. 때로 예배당에서 기도실에 조용히 기도할 때 ‘너도 저렇게 좀 해라.’고 하실 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때로는 읊조리는 찬송, 홀로 조용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입에서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운전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읽을 때 회의를 할 때도 조용히 찬양을 통해 그것이 능력이 될 줄로 믿는다. 뿐만 아니라 읊조리는 것 뿐만 아니라 선포를 하라고 했다. “6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7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선포하고, 말하라.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말하라.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한탄했다. ‘성도들이 마땅히 선포해야 될 살아계신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우리는 침묵과 배은망덕에 무덤에 파묻어버린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송축하며 노래하리다. 그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기념하고 전하라는 것이다. 선교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없는 곳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선교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다른 이들에게 간신히 구원받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힘 있게 찬송하는 백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이제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렇게 찬송한다. 큰 소리로, 작은 소리로 선포하며 기념하며 이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위대하심 은혜로우심을 8절 이하에서 설명한다. “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비슷비슷한 말씀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하심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죄, 반역, 배신, 허물을 만날 때 은혜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허물이 없었더라면 은혜가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와 배신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은 그냥 선하신 분으로 완전히 선하신 분으로 존재하셨을 것이다. 선하심이 인간의 죄와 만날 때 은혜로 바뀌는 것이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도 구비되지 못하면 은혜 됨이 되지 않는다. 첫 번째 은혜의 조건은 그 은혜를 베풀 의무가 없는 분이 어떤 은혜를 베풀 만한 아무런 은혜에 대한 의무가 없는 분이 베풀어야 은혜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베풀어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마땅히 죽어야 될 죄인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착각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죽을 필요가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의무가 없으시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를 벌하는 것으로만 끝내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인간을 구원해야만 하나님이 의로워지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그 스토리를 출발해야 은혜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 건지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죄악 가운데 건지심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 되시는 것이다. 선하실 뿐 아니라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다. 여러분 갚아야 될 것이 있는 것을 준 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죠. 무엇인가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그리고 자유로우신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하신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마땅히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은 은혜가 아니죠. 보상은 은혜와 다르다. 은혜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주어질 필요가 없는 자,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베풀 은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넘치셔서 베푸신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어줬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에게까지 넘치는 은혜다. 그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이다.

 

그 은혜가 베풀어지는 은혜를 베푸시기로 선택하신 세 종류의 사람들만 열거해보겠다.

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넘어지는 자를 붙들어주신다. 세상은 넘어진 자를 버린다. 넘어진 자를 짓밟는다. 넘어진 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자를 집중하여 보신다. 하나님 이 세상을 두루 감찰하셔서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은혜 베풀 자를 찾으시는데 오늘도 누가 넘어졌는가? 하나님이 찾고 계신다. 얼마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까?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누가 넘어졌고, 누가 넘어져서 찾고 있는지를 붙들어주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사 오늘도 넘어질 위기에 있는 자, 넘어진 자를 하나님은 찾아가셔서 붙들어주고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가 넘어져놓고 안 넘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넘어지고 있는데 나 괜찮다고 주장 하는게 이상하다. 그런 말이 있죠. “자는 척 하는 아이는 깨울 수 없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안 넘어진 척 하는 사람은 붙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붙들어주시려면 나 넘어졌습니다. 나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되는데 “넘어져놓고 나 안 넘어졌다”고 하면 그게 대화가 되겠습니까? “나 넘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넘어진 때라고 기억하십시오. 내가 넘어지면 세상은 버리고 짓밟아도 하나님은 나를 붙잡아주신다.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또한 하나님은 앙망하는 자의 소원을 만족시켜주신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앙망하는 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보는 자,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 갈한 자에게는 물을 주시고 마음이 외로운 자에게는 위로자가 되어주시고 위로한 심령에게는 하나님께서 만족케하여 주신다. 그것이 어떤 목마름인지 간에 모든 종류의 중독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왜곡된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지고 만족해야 할 것은 다른 것으로 인해 채워지고 만족하게 되어져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집착은 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왜곡된 표현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으로 만족하면 그 모든 것은 젖 뗀 아이처럼 엄마 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떼고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하나님께서 만족시켜주시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두루 살피사 갈망하는 자를 찾으신다. 앙망하는 자를 찾으신다.

 

세 번째 은혜로 선택한 자는 진실하게 간구하는 영혼은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얼마나 거룩한가는 사실 얼마나 진실한가이다. 거룩은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니라 덧입혀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진실, 정직,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 베풀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죄가 없는 의인이 아니라 진실한 죄인이다. 우리 모두는 죄가 없는 의인이 아니다. 아무리 감추고 아무리 숨기고 해도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앞에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된 죄인, 그 진실함으로 나갈 때 가까이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정리하면 왕이신 하나님은 위대하심, 그 영광스러운 위엄은 무엇으로부터 나타납니까? 넘어진 자를 붙들어주시고 그리고 간절히 앙망하는 소원을 만족시켜주시고 진실하게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하심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낮고 낮은 곳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넘어진 자, 힘들어하는 자, 고통 받는 자, 그 모든 영혼들 진실한 마음으로 낮아진 영혼에게 가까이하셔서 그들을 붙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호령하는데 있지 않다.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권력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섬김에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낮아짐에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기뻐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CS루이스는 1942년에 한 유명한 설교에 있다. 영국과 독일이 전쟁 중에 있을 때 영국의 옥스퍼드 성 마리아 교회에서 영광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한 편의 설교인데 책이 되어서 수많은 성도들이 읽고 또 읽는데 저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서 읽는데 세 번을 읽으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구요. 깊은 의미의 설교였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무겁다, 무게라는 뜻이다. 제목도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는 어디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그것은 죄악 되고,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이유가 된 다는 것, 그것이 영광의 무게다. 단지 불쌍히 여긴다는 존재가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기뻐하듯 아비가 그 아들을 기뻐하듯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기뻐하신다. 죄 많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주시고 우리를 싸매주시고 고쳐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무게는 한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진다. 그 무게를 느끼고 살게 되기를 축원한다. 한없이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은혜로 나타난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영원토록 찬양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