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폴 고갱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심리학자 루이스 코졸리노에 의하면 리더십 유형에 따라 사람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타고난 알파(Alphas)형’이다. 이들은 집단 안에서 자신감 있게 목소리를 낸다. 필요할 때는 다른 멤버를 이끌 수 있는 타고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인물 중에는 요셉이나 다윗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둘째, ‘타고난 베타(Betas)형’이다. 이들은 타고난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소명을 부여하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격려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하며 버티던 초기의 모세가 이런 유형이다.
셋째, ‘가짜 알파(Psuedo Alphas)형’이다. 이들은 겉보기에 알파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내면의 베타 때문에 갈등하며, 스스로를 알파라 착각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부정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허세를 부리면서 불안감을 억누른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간 후의 사울이 이런 유형이다.
넷째, ‘알파추구(Aspiring Alphas)형’이다. 이들은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베타형이지만 알파가 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럴 능력 있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제발 저 좀 알아주세요!”유형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남의 이목을 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안달한다. 하지만 이들의 인식과 달리 천성은 추종자형이기 때문에 내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유형도 ‘알파추구형’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심리치료나 진로상담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는 야곱이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알파추구형’ 야곱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2절까지 말씀과 함께 오늘 우리가 묵상할 그림은 폴 고갱(1848~1903년)이 19세기 후반인 1888년에 그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정식 이름은 이보다 길다. ‘설교 후의 환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아내와 아들 등 일행 모두를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낯선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나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한다. 천사는 야곱이 완강하게 버티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든다. 그리고 말한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주어라.”
그러나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이에 천사가 말했다.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전형적인 알파추구형이다. 사실 성경 인물 중에 야곱만큼 집요한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캐릭터도 드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만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고, 엄마와 결탁하여 아버지와 형을 비열하게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뺏은 적도 있다. 희대의 사기극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이 보낸 천사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천사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죽어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틴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천사가 오죽하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고갱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고갱은 성경 본문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고대 중근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19세기 자신이 살던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축제의 한 장면처럼 그려냈다.
고갱은 이번에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강렬한 원색을 동원한다. 일부러 원근법도 왜곡하면서 평면적인 색면 처리를 하는 것도 평시 그의 특기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여느 작가가 그린 경건한 이미지의 종교적 주제의 성화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천사와 야곱이 씨름을 하는 풀밭은 푸른 초원이나 모래밭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붉은 색이다. 그리고 그 풀밭을 나무가 대각선으로 반을 나누고 있다. 왼쪽에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하얀색 보닛을 쓴 여성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모습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정말 씨름하는 장면과 이를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을 묘사한 민속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아내와 아들 등 일행 모두를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낯선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나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한다. 천사는 야곱이 완강하게 버티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든다. 그리고 말한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주어라.”
그러나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이에 천사가 말했다.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전형적인 알파추구형이다. 사실 성경 인물 중에 야곱만큼 집요한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캐릭터도 드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만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고, 엄마와 결탁하여 아버지와 형을 비열하게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뺏은 적도 있다. 희대의 사기극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이 보낸 천사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천사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죽어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틴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천사가 오죽하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고갱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고갱은 성경 본문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고대 중근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19세기 자신이 살던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축제의 한 장면처럼 그려냈다.
고갱은 이번에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강렬한 원색을 동원한다. 일부러 원근법도 왜곡하면서 평면적인 색면 처리를 하는 것도 평시 그의 특기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여느 작가가 그린 경건한 이미지의 종교적 주제의 성화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천사와 야곱이 씨름을 하는 풀밭은 푸른 초원이나 모래밭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붉은 색이다. 그리고 그 풀밭을 나무가 대각선으로 반을 나누고 있다. 왼쪽에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하얀색 보닛을 쓴 여성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모습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정말 씨름하는 장면과 이를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을 묘사한 민속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다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에게 나타난 낯선 남자는 천사이다. 천사는 신성한 신비를 상징한다. 성경에도 처음에는 ‘어떤 사람’으로 이 낯선 남자를 표현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보낸 천사임을 암시한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는 것은 고난과 재생을 상징한다. 천사와 만난 후에 야곱은 엉덩이뼈를 다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이것은 야곱의 ‘고난’을 상징한다. 하지만 야곱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야곱은 온전히 새롭게 거듭난다. 일종의 ‘재생’이자 ‘부활’의 통과의례를 치른 것이다.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과거 도망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꼼수를 부리던 야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와 작당하여 형 에서를 속이고,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 아내와 재물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이 넘게 절치부심하던 야곱.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만져주시고,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소개하자면, 고갱은 이 그림을 자신이 살면서 그림의 배경으로 삼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 성당에 걸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당의 주임신부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데다가 민속화 같은 속세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기는 고갱의 그림을 구입하는 걸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결국 이 그림은 지금 에든버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몇 년 전 고갱이 1892년에 그린 ‘언제 결혼하니’라는 그림이 경매장에서 3,200억 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그림도 최소한 몇 십억을 넘어 몇 백억을 호가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의 가격까지 매길 능력은 없지만 추정컨대 말이다.
뭐든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고갱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성당 주임신부 때문에 그 성당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굴러온 복덩이를 걷어차 버린 격이다. 아마 지금도 이 성당이 남아있다면, 성당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주임신부의 결정을 땅을 치며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는 것은 고난과 재생을 상징한다. 천사와 만난 후에 야곱은 엉덩이뼈를 다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이것은 야곱의 ‘고난’을 상징한다. 하지만 야곱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야곱은 온전히 새롭게 거듭난다. 일종의 ‘재생’이자 ‘부활’의 통과의례를 치른 것이다.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과거 도망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꼼수를 부리던 야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와 작당하여 형 에서를 속이고,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 아내와 재물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이 넘게 절치부심하던 야곱.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만져주시고,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소개하자면, 고갱은 이 그림을 자신이 살면서 그림의 배경으로 삼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 성당에 걸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당의 주임신부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데다가 민속화 같은 속세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기는 고갱의 그림을 구입하는 걸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결국 이 그림은 지금 에든버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몇 년 전 고갱이 1892년에 그린 ‘언제 결혼하니’라는 그림이 경매장에서 3,200억 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그림도 최소한 몇 십억을 넘어 몇 백억을 호가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의 가격까지 매길 능력은 없지만 추정컨대 말이다.
뭐든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고갱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성당 주임신부 때문에 그 성당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굴러온 복덩이를 걷어차 버린 격이다. 아마 지금도 이 성당이 남아있다면, 성당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주임신부의 결정을 땅을 치며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