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공리와 기독교 세계관
세계관 운동의 나침반 ‘세계관학교(OWA)’
선택공리와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나?”
신앙 좋은 사람들도 자녀나 전도대상자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 질문은 많은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장벽이기 때문이다. 수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나도 이 질문에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기에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차츰 멀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수학을 더 깊이 공부하면서 이 문제가 이성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기독교를 지지하게 되었다. 수학은 논리적으로 하나씩 증명해가면서 학문체계를 쌓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을 역으로 따지고 내려가면 더 이상 증명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그것을 ‘공리(axiom)’라고 부른다. 중학교 때 배우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 예다. 다섯 개의 공리로부터 모든 평면기하의 정리를 증명해 낼 수 있다. 현대 수학도 학문 자체의 토대인 집합론은 열 개 정도의 공리로 시작한다. 그중에서 ‘선택공리’는 당연해 보이는데 다른 공리들에 비해 다소 어렵다. 이 때문에 수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 수학의 깊이 있는 결과들은 대부분 이 공리를 사용해야 하고, 이걸 사용해도 아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이 공리를 빼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
신의 존재 문제는 수학에서 선택공리처럼 받아들이기 다소 주저되지만, 더 이상 증명 불가능하고, 모순이 없다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다. 수학에서처럼 이것을 빼도 학문체계를 이루고, 더해도 학문체계를 이루지만 후자(고등학문)는 전자(초등학문)를 포함하는 보다 큰 체계가 될 뿐만 아니라 보다 심오한 결과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현명한 수학자들처럼 당연히 후자일 것이고, 나도 교회로 돌아왔다.
사실 신의 존재 여부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죽음 같은 정말 중요한 일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질문에 초등학문에서는 답을 못 구해서 엉뚱하게 결론짓지만(골 2:8), 고등학문에서는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무신론적(세상적) 세계관에 비해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세상은 경쟁 사회이고, 제로섬 사회이다. 내가 갖든지 아니면 네가 갖든지 둘 중 하나다. 세상에서는 내가 가지면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런데 이래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섬김을 통해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 성공은 세상적인 성공도 포함하고 있고, 더욱 심오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의 역설이고,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실제 경험하는 일이다.
저명한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예일대학 교수로 있다가 데이브레이크공동체로 들어가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마지막까지 했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 수 없는 장애인 아담을 돌보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모아놓고 열렬한 설교를 하는 것이 그가 맡은 일과다. 나중에 중증장애인 아담이 죽었을 때 그가 한 조사(弔詞)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데이브레이크에서 보낸 첫해 그를 돌보았고, 그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내 상담자요 스승이요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어떤 책이나 교수, 영적 지도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가 아담을 “내 상담자요 스승이요 인도자”라고 했을 때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인가 거꾸로 된 것 같고 조사이기 때문에 흔히들 하는 문학적 수사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조사 전체와 그의 책들을 보면 이것은 그가 실제로 느낀 정직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감동적인 장면이다(고전 1:27~28).
우리가 아담이다. 우리가 약해지고 두려움에 빠졌을 때 서로를 치유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공동체의 의미이다. 우리는 역설이 가능한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다른 세계관들이 난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수 24:15).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답을 비교해봐야 한다. 답은 세계관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해석할 때 더욱 명료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세계관학교(OWA)에서는 세계관을 올바로 인지하고 삶에 적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서평이나 헨리 나우웬 같은 훌륭한 경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10여 년 온누리 세계관학교를 섬기면서 많이 배우고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 김혁 성도(서초A공동체, 서울대 명예교수)
신의 존재 문제는 수학에서 선택공리처럼 받아들이기 다소 주저되지만, 더 이상 증명 불가능하고, 모순이 없다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다. 수학에서처럼 이것을 빼도 학문체계를 이루고, 더해도 학문체계를 이루지만 후자(고등학문)는 전자(초등학문)를 포함하는 보다 큰 체계가 될 뿐만 아니라 보다 심오한 결과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현명한 수학자들처럼 당연히 후자일 것이고, 나도 교회로 돌아왔다.
사실 신의 존재 여부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죽음 같은 정말 중요한 일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질문에 초등학문에서는 답을 못 구해서 엉뚱하게 결론짓지만(골 2:8), 고등학문에서는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무신론적(세상적) 세계관에 비해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세상은 경쟁 사회이고, 제로섬 사회이다. 내가 갖든지 아니면 네가 갖든지 둘 중 하나다. 세상에서는 내가 가지면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런데 이래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섬김을 통해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 성공은 세상적인 성공도 포함하고 있고, 더욱 심오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의 역설이고,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실제 경험하는 일이다.
저명한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예일대학 교수로 있다가 데이브레이크공동체로 들어가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마지막까지 했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 수 없는 장애인 아담을 돌보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모아놓고 열렬한 설교를 하는 것이 그가 맡은 일과다. 나중에 중증장애인 아담이 죽었을 때 그가 한 조사(弔詞)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데이브레이크에서 보낸 첫해 그를 돌보았고, 그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내 상담자요 스승이요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어떤 책이나 교수, 영적 지도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가 아담을 “내 상담자요 스승이요 인도자”라고 했을 때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인가 거꾸로 된 것 같고 조사이기 때문에 흔히들 하는 문학적 수사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조사 전체와 그의 책들을 보면 이것은 그가 실제로 느낀 정직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감동적인 장면이다(고전 1:27~28).
우리가 아담이다. 우리가 약해지고 두려움에 빠졌을 때 서로를 치유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공동체의 의미이다. 우리는 역설이 가능한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다른 세계관들이 난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수 24:15).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답을 비교해봐야 한다. 답은 세계관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해석할 때 더욱 명료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세계관학교(OWA)에서는 세계관을 올바로 인지하고 삶에 적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서평이나 헨리 나우웬 같은 훌륭한 경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10여 년 온누리 세계관학교를 섬기면서 많이 배우고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 김혁 성도(서초A공동체, 서울대 명예교수)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