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카라바조의 ‘바울의 회심’(1601년)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그는 내 이름을 온누리에 전할 사람이다”

board image<카라바조가 그린 '바울의 회심'(1600년작,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일반인에 비해 크리스천이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강퍅(剛愎)’이다. 강퍅은 굳셀 강(剛), 괴팍할 퍅(愎)자를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성미가 깔깔하고 고집이 세다, 괴팍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다. ‘괴팍하다’도 원래는 ‘괴퍅하다’였는데, 발음하기 쉬운 ‘괴팍하다’로 표준말이 바뀌었다. 하지만 ‘강퍅하다’는 ‘강팍하다’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쓴다. 
구약에서 가장 강퍅한 사람이 누구일까? 아마 이집트 왕 바로일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출 9:12). 
그럼 신약에서 가장 강퍅한 사람은 누구일까? 여럿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바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자신도 그것을 얻었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던 당시였기에 로마제국의 시민권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다. 
바울은 자신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인정할 만큼 강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융심리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인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바울은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는 의지할 분명한 규범이 필요했다. 다문화사회에서 자란 그에게는 상대성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어떤 확고한 원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 바울은 ‘조그만 사람’을 뜻한다. 바울은 작은 체구에 곱사등이었다. 게다가 특이한 병을 앓았다. 하인리히 슐리어에 따르면 바울은 간질병을 앓았다고 한다.”
강퍅한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 순교의 현장에 있었지만 스데반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한 적이 없다(행 22:20). 
역사학자 헨드릭 빌렘 반 룬의 “고대 율법의 이름으로 새로운 죄를 저지르는 젊은 폭도들의 괴수”라는 표현처럼 바울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무조건 가두고 고문하는 무시무시한 박해자였다. 
그런 바울에게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오늘 카라바조가 그린 ‘바울의 회심(回心)’(1601년)이다. 함께 묵상할 성경 본문은 사도행전 9장이다. 
 
강퍅한 바울의 회심(回心)
 
그날도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말을 타고 군사들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다. 바울이 다메섹에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그를 둘러쌌다. 깜짝 놀란 바울이 땅에 쓰러졌다. 그때 바울이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지금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도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했다. 화면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강렬한 빛은 말 잔등을 거쳐 쓰러진 바울의 몸 전체를 비추고 있다. 말에서 떨어진 바울은 눈이 뒤집혔다. 검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희멀겋게 흰자위만 남아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는 테네브리즘(tenebrism) 즉, 강렬한 명암의 대비를 통해서 그림 속 주인공에게 신비로움과 성스러움을 부여하는 기법의 창시자이다. 프랑스의 조르주 드 라 투르,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등 많은 거장이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 기법을 모델 삼아 자신들의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카라바조는 ‘바울의 회심’에서도 이 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주인공인 바울에게는 빛이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이 빛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바울은 진리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 진리에 눈먼 자의 상징이다. 말에서 떨어져 쓰러진 그에게 쏟아지는 빛은 ‘구원의 빛’이다. 쓰러진 바울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있다. 찬양하는 듯한 이 포즈를 기독교 도상학(Christian Iconography)에서는 ‘오란트(orant) 자세’라고 부른다. 무조건적 항복, 무조건적 순종의 상징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든다. 구원의 빛은 ‘율법의 빛’을 대신한다. 바울을 사로잡고 있던 율법적인 강박은 메시아의 빛을 받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변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던 이전의 바울은 죽고, 생명의 빛을 받고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림에서 바울을 짓밟을 것처럼 압도적인 위세로 앞발을 치켜든 말은 세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말은 겸손한 나귀와 대조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탔던 것은 고귀함과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겸손함을 상징하는 나귀였다. 비록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의 낙마(落馬)는 세상적인 권위를 내려놓고 메시아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바울의 새로운 삶을 상징한다. 
쓰러진 바울의 주변에는 망토와 투구, 바울의 칼 등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있다. 로마제국의 일원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을 핍박하던 무기들은 이제부터는 바울의 것이 아니다. 바울은 물리적인 폭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박해하던 무기를 버렸다. 바울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고, 구원의 음성이 들릴 때 무장해제당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전파자
 
이제 바울은 완전히 새롭게 무장할 것이다. 물리적인 무기가 아니라 영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말이다. 예수님의 싸움은 평화와 용서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마 5:9). 바울은 마귀의 간계에 맞서 대적하기 위한 영적인 전쟁에 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영적인 무기는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평안의 신발 등이다(엡 6:14~17). 
바울은 율법에 사로잡혀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메시아의 빛, 성령의 빛을 받아 눈을 뜰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그는 암흑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서 내 이름을 온누리에 전할 사람이다”(행 9:15).
성령의 힘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한 충실한 사도가 되었다.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회심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격정적 성격, 원칙만 고집하는 공격성, 강박관념은 여전히 남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같은 성정을 예전과는 다르게 이용한다. 그의 성정이 삶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끌어내는 데 이용된다.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것처럼 이제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과 맞서 싸운다.”
성령에 힘입어 자신과의 내면적 투쟁에서 승리한 바울은 유대교의 한 지파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기독교를 온 세상 끝까지 전하는데 헌신한 ‘초대교회의 위대한 전파자’가 되었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