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5
최선의 감정 선택!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저의 의견을 표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화를 내고 싶은데, 제가 크리스천인 것을 다 알아서 눈치가 보입니다. 제 안에 쌓이는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크리스천이 화를 내면 죄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저의 의견을 표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화를 내고 싶은데, 제가 크리스천인 것을 다 알아서 눈치가 보입니다. 제 안에 쌓이는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크리스천이 화를 내면 죄일까요?”
우리가 신앙적인 존재라고 해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너무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욕구가 있다. 다양한 실수와 흠결도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 모든 것을 신앙의 이름 하나로 가둬두고 살 수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성화(聖化)의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책임이 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살면서 더 많은 화를 느끼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이해하고 있어야 자신을 다독거리고 타인의 감정도 수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완벽함만을 요구하는 건강하지 못한 인격의 사람이 되고 만다. 세상의 요구가 어떠하든 화내지 않고 모두 수용해 준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빛과 소금은 주변에 저항하는 존재이다. 빛이기 때문에, 소금이기 때문에 그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겨낼 저항이 있다. 그 저항을 이겨내다 보면 때로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그 분노가 정당하다면 때로 표현할 책임이 있다.
화를 내야만 더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다만 그 화를 표현하는 방법에서 크리스천의 책임 있는 행동이 요구된다. 먼저 화를 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허용범위가 넓고, 타인에게는 까다롭고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요새 하는 말을 빌리자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감정이입이 있는 경우이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들여다보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기대치가 너무 크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 쉽게 화를 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왜 화를 내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게 정당성 없는 화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할 때는 정당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이해받을 수 있다.
정당하다고 해서 표현 방식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인격의 자질이 드러난다. 아무리 정당한 화라고 해도 주변을 고려한 성숙함이 없으면 신앙에 걸맞은 건강한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우리의 숙제이다. 심리적 노력 안에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최선의 감정 선택’을 제안하고 싶다.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시글락에서의 사건이 나타나 있다.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이 가족을 시글락에 두고 군사 작전을 위해 떠나 있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마을을 초토화한다. 다윗과 부하들은 완전히 비탄에 빠졌고 그 비탄이 분노로 바뀌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 비극을 리더인 다윗의 책임으로 돌리려 했다. 이 분노가 그들에게는 정당한 듯 보였지만, 최선은 아니었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
다윗에게 이 상황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왜 없었겠는가? 다윗 역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삶과 터전이 파괴된 상황을 누구보다 직면하고 책임지고 헤쳐나가야 했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성난 공동체는 사실 다윗이 자비로 거둬들인 사람들이었다. 다윗은 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정을 선택한다.
“…다윗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해 용기를 냈습니다”(삼상 30:6).
세상에는 너무 많은 분노가 있다. 그 분노가 어떤 움직임의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가 출발이 될 수 없다. 분노가 우리의 시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가 우리의 마침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는 비통함 안에서도 최선의 감정 선택을 해야 한다.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윗은 기도 속에서 그 일을 해냈고,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했다. 기도 속에 분노를 몰아내고, 슬픔을 다독이며, 다시 일어나 백성을 돌아보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이것이 크리스천 청년들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최선의 감정 선택 말이다.
/ 원유경 목사(SNS청년부)

화를 내야만 더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다만 그 화를 표현하는 방법에서 크리스천의 책임 있는 행동이 요구된다. 먼저 화를 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허용범위가 넓고, 타인에게는 까다롭고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요새 하는 말을 빌리자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감정이입이 있는 경우이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들여다보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기대치가 너무 크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 쉽게 화를 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왜 화를 내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게 정당성 없는 화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할 때는 정당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이해받을 수 있다.
정당하다고 해서 표현 방식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인격의 자질이 드러난다. 아무리 정당한 화라고 해도 주변을 고려한 성숙함이 없으면 신앙에 걸맞은 건강한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우리의 숙제이다. 심리적 노력 안에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최선의 감정 선택’을 제안하고 싶다.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시글락에서의 사건이 나타나 있다.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이 가족을 시글락에 두고 군사 작전을 위해 떠나 있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마을을 초토화한다. 다윗과 부하들은 완전히 비탄에 빠졌고 그 비탄이 분노로 바뀌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 비극을 리더인 다윗의 책임으로 돌리려 했다. 이 분노가 그들에게는 정당한 듯 보였지만, 최선은 아니었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
다윗에게 이 상황에 대한 비탄과 분노가 왜 없었겠는가? 다윗 역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삶과 터전이 파괴된 상황을 누구보다 직면하고 책임지고 헤쳐나가야 했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성난 공동체는 사실 다윗이 자비로 거둬들인 사람들이었다. 다윗은 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정을 선택한다.
“…다윗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해 용기를 냈습니다”(삼상 30:6).
세상에는 너무 많은 분노가 있다. 그 분노가 어떤 움직임의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가 출발이 될 수 없다. 분노가 우리의 시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가 우리의 마침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는 비통함 안에서도 최선의 감정 선택을 해야 한다.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윗은 기도 속에서 그 일을 해냈고,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했다. 기도 속에 분노를 몰아내고, 슬픔을 다독이며, 다시 일어나 백성을 돌아보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이것이 크리스천 청년들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최선의 감정 선택 말이다.
/ 원유경 목사(SNS청년부)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