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
지난 9월 6일(일) 열린 일본어예배부 ‘온누리 패밀리 축제’에 243명이 찾아와 주셨다. 참가자는 모두 아직 교회와 연결되지 않은 일본인 주재원 가정과 한일 가정이었다. 기독교 인구가 1%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에서 교회가 여는 축제에 믿지 않는 가족 243명이 모인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행사장은 일본의 여름 축제를 옮겨 놓은 듯했다. 고리 던지기와 사격, 야키소바와 빙수를 파는 노점, 연극과 찬양까지 일본어예배부 성도님들이 손수 준비해 주셨다. 주제는 ‘하나님의 가족’이었다. 국적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는 초대가 하루 종일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그런데 인원수보다 내 마음에 더 남은 것이 있다. 행사장 곳곳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예전에 한국어 교실에 다니던 분이 그곳에서 가르치던 일본어예배부의 한 자매를 발견하고는 “お久しぶりです(오히사시부리데스, 오랜만이에요)”하며 인사를 건네셨다. 한국어 교실을 떠난 뒤에도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었다. 사람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전도 캠프에 왔던 일본인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외치며 캠프에서 선생님을 맡았던 한국인 자매에게 달려갔다. 한국인 자매가 일본인 아이를 섬기고, 그 아이가 안심하며 품에 뛰어드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두 나라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생각하면 그 몇 초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의 증거로 충분했다.
일본인 전도에서는 프로그램보다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웃는 얼굴로 복음을 들어 주신다. 그러나 웃으며 듣는 것과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아직 깊은 거리가 있다. 그래서 ‘누가 전하고 있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일본 선교는 나아간다.
그날의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1989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을 위해 기도하던 작은 기도 모임이었다. 그 일본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싶어서 모인 몇 사람의 기도가 전부였다고 들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가장 먼저 주신 사역은 전도집회가 아니라, 이듬해인 1990년 일본인 주부들을 위해 연 ‘한글 강좌’였다. 복음도 전하지 않는 순수한 어학 교실이었고,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베이비시터까지 대기시켰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내어 준 것이다.
그 한글 강좌가 입소문을 타고 50여 명의 일본인이 모였다. 그곳에서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생겨났고, 아이들을 위한 토요학교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어 예배가 태어났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필요를 섬기는 수수한 일을 사용하셨다. 그로부터 35년, 그날 “오히사시부리데스”하며 서로를 부르던 목소리는 그 걸음의 연장선이었다.
그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들도 온 힘을 다해 찬양하고, 춤추며, 전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 뜻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신뢰하기에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신뢰하기에 들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 집회를 열어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체육관에 가득했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40년의 기도와 35년의 작은 걸음,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신뢰’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뿐이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6). 복음의 씨앗은 분명히 뿌려지고 있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곳에 믿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한다.
/ 카와무라 요시키 목사(일본어예배 담당)
행사장은 일본의 여름 축제를 옮겨 놓은 듯했다. 고리 던지기와 사격, 야키소바와 빙수를 파는 노점, 연극과 찬양까지 일본어예배부 성도님들이 손수 준비해 주셨다. 주제는 ‘하나님의 가족’이었다. 국적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는 초대가 하루 종일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그런데 인원수보다 내 마음에 더 남은 것이 있다. 행사장 곳곳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예전에 한국어 교실에 다니던 분이 그곳에서 가르치던 일본어예배부의 한 자매를 발견하고는 “お久しぶりです(오히사시부리데스, 오랜만이에요)”하며 인사를 건네셨다. 한국어 교실을 떠난 뒤에도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었다. 사람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전도 캠프에 왔던 일본인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외치며 캠프에서 선생님을 맡았던 한국인 자매에게 달려갔다. 한국인 자매가 일본인 아이를 섬기고, 그 아이가 안심하며 품에 뛰어드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두 나라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생각하면 그 몇 초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의 증거로 충분했다.
일본인 전도에서는 프로그램보다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웃는 얼굴로 복음을 들어 주신다. 그러나 웃으며 듣는 것과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아직 깊은 거리가 있다. 그래서 ‘누가 전하고 있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일본 선교는 나아간다.
그날의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1989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을 위해 기도하던 작은 기도 모임이었다. 그 일본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싶어서 모인 몇 사람의 기도가 전부였다고 들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가장 먼저 주신 사역은 전도집회가 아니라, 이듬해인 1990년 일본인 주부들을 위해 연 ‘한글 강좌’였다. 복음도 전하지 않는 순수한 어학 교실이었고,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베이비시터까지 대기시켰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내어 준 것이다.
그 한글 강좌가 입소문을 타고 50여 명의 일본인이 모였다. 그곳에서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생겨났고, 아이들을 위한 토요학교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어 예배가 태어났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필요를 섬기는 수수한 일을 사용하셨다. 그로부터 35년, 그날 “오히사시부리데스”하며 서로를 부르던 목소리는 그 걸음의 연장선이었다.
그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들도 온 힘을 다해 찬양하고, 춤추며, 전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 뜻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신뢰하기에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신뢰하기에 들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 집회를 열어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체육관에 가득했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40년의 기도와 35년의 작은 걸음,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신뢰’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뿐이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6). 복음의 씨앗은 분명히 뿌려지고 있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곳에 믿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한다.
/ 카와무라 요시키 목사(일본어예배 담당)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