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가복음 2장 18~22절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비전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멈출 수 없는 힘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제도도, 조직도, 어떠한 사람들의 내규도 없는 교회였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고 순수할지라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퇴색하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참여할지라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참여가 점점 미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확장되어가고 있고, 운동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지역만 보면 교회가 쇠퇴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지역에서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소위 ‘후기 기독교사회’, ‘포스트 크리스차니티 시대’라고 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지나갔다”고 절망 섞인 말을 하지만 9월 말에 온두라스에서 놀라운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 선교팀도 함께 참가했습니다. 국가적으로 ‘성경의 날’을 제정해서 모든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고, 존중하도록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면 위법이라고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대부분 잘 사는 나라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경을 존중하고, 성경에 살길이 있다고 믿고 따르는 나라도 있습니다. 한 지역에서는 교회가 쇠퇴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지역에서는 부흥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쇠퇴할지라도 어떤 교회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교회는 쇠퇴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지역, 핍박 속에 있는 지역, 통제 속에 있는 지역에 번져나가는 하나님 생명의 운동력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 믿음이 식었다고 교회가 쇠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열정이 식고 자기 믿음이 식으면 세상의 모든 교회가 식은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만큼 무서운 교만이 없습니다. 지금도 뜨거운 열정과 순교의 열정으로 헌신하고, 사역하면서 주님의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는 신실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 어떤 세력이나 정권, 권력과 문화도 막을 수 없는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력이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음부의 권세가 무너뜨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권세 안에 있는 주님의 교회가 온누리교회 안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3M 사이클’
 
 
때로 주님의 교회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운동력이 쇠퇴해져가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을 관찰한 미국 달라스 신학교의 하우드 핸드릭스 교수는 이를 ‘3M 사이클’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1st Movemenet(운동)’입니다. 이 단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영적 운동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2nd Machime(기계)’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어가는 것 같지만 영적 운동력을 잃어버리고 기계처럼 되어 버리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3rd  Monument(기념비)’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과거의 역사 속에 갇혀버리는 단계입니다. 이 사이클을 교회 유형에 적용해보면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1st Movemenet(운동)는 ‘선교사 교회(Missionary church)’입니다. 단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자체가 선교사 공동체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심령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명이요, 기쁨이요, 사명이 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선교사 교회였습니다. 역사가 흘러가면서 많은 사람이 교회의 일원이 되고,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면서 어떤 교회들은 기계처럼 움직이는 조직화되고 체계화는 되었고, 또 어떤 교회는 형식과 제도, 문화만 남은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2nd Machine(기계)으로 현상유지 교회(Maintenance church)입니다. 현상유지만 하고 기계처럼 움직이며 돌아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가 머지않아 세 번째 단계인 3rd Monument(기념비)로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됩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박물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을 방문해보면 그 교회의 역사를 먼저 자랑합니다. 예배당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자랑합니다. 예배당에 걸린 그림이 몇 년 되었는지를 강조합니다. 숨 쉬는 것조차 제한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가치가 있습니다. 잘 보존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대한 설명의 전부라면 박물관 교회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운동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될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시작은 아주 좋은 말씀운동이었습니다. 성전을 잃어버린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연결해주고, 그들이 신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말씀운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타난 그들의 모습을 보면 형식과 문화와 제도에 사로잡혀서 결국 위선에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가복음 2장 18절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금식을 안 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은밀하게 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은밀한 금식,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생명을 내어놓고 하는 은밀한 금식 속에 있는 예수님의 영성과 삶을 바리새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금식, 제도적 금식,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금식에 익숙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구별된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오늘날 교회가 왜 운동력을 잃어버리고, 점점 쇠퇴하고, 박물관이 되어버렸는지를 예방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
 
 
예수님은 교회 안에 있어야하는 운동력, 그 생명력의 근원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를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첫째, 결혼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신부가 기뻐하는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19~20절). 
교회의 운동력이 무엇입니까?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교회의 운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 의해서 구속되어 그분의 신부가 되는 기쁨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마주 보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운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을 결혼잔치 모습으로 비유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기대는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결혼문화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예식장에서 신부가 먼저 입장해서 신랑을 기다리는 정도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신랑이 언제 나타날지 모릅니다. 신부는 하염없이 단장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신부가 기다리게 했을까요?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만나는 기쁨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만역 교회 안에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이 없다면 그 교회는 운동력 있는 교회가 되기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기뻐하고, 무엇으로 우리가 운동력을 발휘하고, 무엇을 전하는 것입니까?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중매시키는 것이 교회의 선교요, 전도요, 사역입니다. 만일 그분을 만난 기쁨이 없다면 무엇이 운동력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제도란 언제나 양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력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입니다. 
결혼식을 보면 많은 실수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주례를 하거나 참여하면서 실수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 양해가 됩니다. 결혼식에서 순서가 문제가 있다고 고발당해본적이 없고, 야단맞은 적도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에서는 우울한 얼굴이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기쁜 얼굴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운동력이 있을 때 땅 끝까지 갈 수 있고,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갈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의 운동력 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있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장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금식’이라고 써 붙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혼식장에서는 평소보다 좋고 풍성한 음식을 마련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끝나고 나서 바로 피로연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음식을 먹는 신랑신부는 없습니다.  신랑신부 가족들도 먹을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기쁨 때문에 음식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정한 금식은 기쁨의 금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있기에 절로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슬픔의 금식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이 없을 때입니다. 신랑신부가 싸워서 마음이 아플 때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올바른 관계 속에 있지 않을 때에도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운동력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생깁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옷으로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옷감 조각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찢어지게 된다”(21절).
새로운 옷감은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탄력성이 있습니다. 옛 옷감은 탄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옛 옷을 고치기 위해 새 옷감을 갖다 대면 새 옷감도 못쓰게 될 뿐만 아니라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집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완전히 새 옷을 입어야지 옛 옷을 고치려고 새 옷감을 갖다 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비유로 드셨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왜 금식하지 않느냐? 안식일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생명력, 영적 운동력을 옛 옷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 옷은 망가져야 합니다. 복음은 옷과 같은 문화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대 문화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복음을 그들의 문화 속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천년이 넘는 율법을 통해 형성된 문화 속에 복음을 가두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것을 깨뜨리는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율법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싸움은 세상의 옷, 옛 옷에 복음을 가두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옷감과 같아서 그 새 옷감에 맞는 새 옷으로 짜야 합니다. 교회가 옛 문화를 존속시키는 기관이 된다면 옛 문화와 함께 죽어갑니다. 문화재를 보존하다 보면 교회가 문화재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셋째,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포도즙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 모두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22절). 
성경에는 ‘새 포도주’로 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새 포도즙’입니다. 왜냐하면 가죽부대에 넣기 전 상태는 포도즙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즙이 가죽부대에 담겨서 발효되면서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담그듯이 포도즙을 담가서 생활음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가죽부대에 많은 포도를 넣고 올라가서 밟았습니다. 그러면 밑으로 포도즙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가죽부대에 담아 놓으면 발효되면서 팽창합니다. 새 포도주는 팽창하는 힘이 있어서 가죽부대는 탄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 늘어났다 줄었다 한 가죽부대는 늘어날 수 없어서 팽창하는 가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릴 수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새 포도즙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 부활의 역사는 팽창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운동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이 땅에 가져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나눠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팽창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새 부대가 아니라 새 포도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을 흔히 적용할 때 ‘새로운 조직과 변화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외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하는 새 포도즙이 너희 안에 있는가? 만일 새 포도즙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안에 터져버리는 것이 있다면 잘 터진 것이다. 옛 부대는 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옛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즙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새 부대입니다. 가죽부대가 아니라 포도즙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먼저입니다. 교회가 왜 운동력을 잃어버립니까? 새 옷감과 같이 당기는 힘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교회의 운동력이 점점 쇠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조직과 제도 자체가 예수님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새 포도즙보다 가죽부대가 더 중요하고, 새 옷감보다 옛 옷이 중요하고, 신랑신부의 결혼 보다 주변이 더 중요한 것이 뒤바뀌어져야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의 운동력이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옛 옷을 과감하게 벗고 새 옷감 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기를 원합니다. 옛 가죽부대가 터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가죽부대를 날마다 준비하는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창립 33주년을 맞이해서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부어지고, 능력 있게 날마다 팽창하고, 살아있는 운동력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