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본 체하지 마라
이재훈 목사
신명기 22:1~4
“마음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선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쳐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어느 때나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있고, 그때가 아니면 놓쳐 버리는 선한 일도 있습니다.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질 때 찍힌 감동적인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사진을 ‘ 아메리칸 피에타’ 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진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뉴욕 소방서의 사목 마이클 저지입니다. 그는 건물 파편에 맞아 죽어 가는 동료 소방관을 위해서 기도해주다 자신도 파편에 맞아 죽었습니다. 동료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이 그의 시신을 옮기는 사진이 찍혔습니다. 만약 그가 현장을 피했으면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신음하며 어가고 있는 동료 소방관을 위해서 손잡아 주고 기도해주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도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순간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피할 때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지라도 죽어가는 동료 소방관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주려다 자신도 생명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네 원수도 네 형제다”
오늘 본문은 “못 본 체하지 말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사랑의 중요한 법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네가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그것들을 네 형제에게 데려다 주어라”(1절). “마찬가지로 너는 네 형제의 나귀나 겉옷도 그렇게 하며 네 형제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았을 때도 그렇게 하고 못 본 체하지 마라. 만약 네가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거리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마라.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워 주어라”(3~4절). 어떤 설명이나 주석이 필요 없는 매우 실체적인 교훈입니다. 한 마디로 “네 형제의 소나 양이나 나귀가 길을 잃어버린 것을 보았을 때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어쩌다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조상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셔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된 형제자매 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소유일지라도 형제의식이있다면 다르게 행동할 것입니다. 또한 농경사회에서 소나 나귀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들이 소나 나귀를 잃었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중요한 수단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동물들도 생명을 보호받고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출이집트기 23장 4~5절 말씀에는 형제라는 단어 대신 원수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반드시 주인에게 데려다 주어라. 네가 만약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이 너무 무거워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면 거기 그냥 놔두지 말고 반드시 도와 일으켜 주어라”(출23:4~5). 형제자매라면 도와줄 마음이 생기겠지만 원수라면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나를 미워하고 해치는 사람의 소유라면 굳이 그 사람의 잃어버린 소유물까지 신경을 쓰고, 주저앉은 나귀까지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을까요. 원수의 나귀가 주저앉아 있으면 그 위에 돌이라도 얹어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닐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형제의 범위를 원수까지 확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네 원수도 네 형제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못 본 체하지 말라’ 는 뜻의 히브리어는 ‘숨다’ 는 단어의 재귀형입니다. ‘ 너 자신을 숨기지 말라’ 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숨깁니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남을 돕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자신을 숨기는 성향이 왜 생겼을까요. 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따먹은 이후 우리에게 숨는 성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존재가 되었을 때 선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일들로부터도 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된 순간과 그냥 지나치고 싶어 하는 순간을 주목하십니다.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적 성숙이란 바로 그때에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순간,그때를 놓치지 않고 올바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숙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하셨을까요. 봐도 못 본 척 지나치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잘 속일 수 있는지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못 본 척 지나쳐도 법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가 됩니다. 이 말씀을 십계명과 연관시킨다면 어떤 계명과 관련 있겠습니까. 제 8계명인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또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내가 찾아줄 수 있는데 방치함으로써 남의 것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들춰내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지나칠 정도로 합리화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합리화합니까. “나는 이웃에게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다”, “나는 법을 어길만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며 합리화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웃에게 나쁜 짓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축소하는 경향이있습니다.
여러분,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랑하는 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도움이 필요했고 그때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세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일정 기간 제사장의 임무를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두 가지 사실을 무시했습니다. 첫째,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또 다른 율법에서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원수 같이 여겼던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때 즉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어느 율법사에게 말씀하시니까 그 율법사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교묘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때를 피해가려는 교묘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뜻은 이웃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와줄 마음이 없으면 질문이 많다’ 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질문이 많아집니다. 이웃의 정확한 정의를 몰라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예수님이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전혀 다른 각도의 질문입니다. 전자는 축소하는 질문이고, 후자는 확장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 네가 도와야 할 그 사람이 바로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울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물론 실제로 못 봤을 수도 있습니다. 왜 못 봤을까요. 우리 눈에 들어와 있지만 뇌 속에 저장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수없이 많은 상황을 보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얼마나 많이 눈을 감고 사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것도 못 본 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닫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나는 못 봤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봐야 돕는 것이 아니라 도울 마음이 있어야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 이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는 사람은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요일 3:17). 아카데미상을 다수 수상한 ‘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대학살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과 거래하며 돈을 벌고 있던 ‘ 쉰들러’ 라는 사람에게 유대인들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의 사업을 통해서 1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살리고,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자신은 도망자가 되어버린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에게 조금 더 돈이 있었더라면…” 이라고 말하다가 “아니,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낭비해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못 본 체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만 아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알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마음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숨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