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 조건
요한일서 1장 5~10절
이재훈 목사
믿음을 ‘사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사귐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사귐, 성도들과의 사귐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귐과 성도들과의 수평적 사귐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성도들과 사귐이 없다면 정말 믿음 가운데 있는지 질문해 봐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이 거룩한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 지만 거룩한 사귐이 없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성도들과의 사귐도 있습니다. 헬라어로 사귐이라는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영어로는 ‘Fellowship’입니다. 사귐이라는 단어에는 동행, 동반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트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역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면 조심하십시오. 생각나는 대로 행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귐을 통해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반자 관계를 맺고 동행해야 동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말로는 하나님과 사귀고 싶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 말씀은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할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이 차고, 뜨겁다는 것은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에 머무르는 걸까요.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교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하는데 그 문을 막은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먹는다는 것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사귐을 의미합니다. 함께 먹는다는 것, ‘companion’, ‘동반자’라는 단어는 빵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먹는 교제와 사귐을 원하십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신앙이 미지근했던 이유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문을 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짜 나타나실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셔서 깊이 만나는 하나님보다 성경책 속에 가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면 성경책을 펴서 만나고, 내가 원치 않으면 언제든지 성경책을 닫아 가둡니다. 내가 원할 때만 하나님을 만납니다.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사람은 만나기 싫습니다. 일이 있으나 없으나 늘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사귈 때 진정한 우정이 싹트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좋아야합니다. 진정한 우정은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기대하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야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거짓말
청교도 존 웨인은 1674년에 병이 들었을 때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요. 죽은 후에는 유일한 친구가 될 것일세. 나는 다른 일에는 모두가 싫증이 되더라도 예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일에는 싫증나지 않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네.”
존 웨인은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사귐이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할까봐 걱정이 됩니까. 아니면 원치 않는 곳으로 떠나라고 할까봐 걱정됩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과 사귐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이유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세 가지의 거짓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위선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6절).
사도 요한은 거짓말이라는 충격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백과 행함이 다르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입술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만 내 인생의 왕은 나입니다. 우리의 고백과 삶이 얼마나 다른지는 스스로가 알고,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도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은 어둠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거짓말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면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에서는 사귐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갖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 위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위선, 자기기만, 자기만족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8절).
죄 없다고 할 때 시제가 중요합니다. 현재형입니다.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하는 것은 본성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죄가 아니라 실수나 인간의 발달에 따르는 고통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초대교회에서 팔라게우스라는 사람이 원죄를 부인하는 주장을 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죄의식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죄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바로 자기기만입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태어났습니다. 심히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죄 없다고 말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지지 못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자기만족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10절).
비슷한 단어들이지만 의미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시제를 통해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죄가 없다’는 표현은 부정과거형입니다.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헬라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육체를 떠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적 지식을 얻게 되면 깨달음을 얻는데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믿는 사고방식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번 용서를 받으면 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지라도 충분히 용서받은 상태고, 더 이상 내 안에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회개했으니 더 이상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죄와 구원의 관계를 혼동시켜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책감에 빠기게 만듭니다. 구원의 진리를 왜곡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단입니다. 영지주의적인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잘못된 교리의 이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 거짓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는척하는 아이는 깨울 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고 있으면 깨울 텐데 자는척하니까 깨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은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로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구원을 경험하지 않았는데 구원받은 척하면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의 핵심은 정직입니다. 자기 위선과 자기기만과 자기만족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먼저
여러분, 거짓말을 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4~5절).
사도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할 때 어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빛은 거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사랑의 하나님보다 빛이신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두 개의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빛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빛은 거룩이고, 사랑은 은혜입니다.
요한일서는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때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면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지고, 교만에 빠지고, 위선에 빠집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의 어두움이 드러나고,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회개할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고, 은혜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로마서도 이런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는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처해있는 인간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공의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먼저 설명합니다. 빛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사랑이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면 우리는 계속 거짓말하고,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고, 죄 가 없고, 문제도 없다면서 우리의 상태를 왜곡하고 포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기
하나님은 빛입니다. 그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단 한가지입니다. 바로 자백입니다. 자백은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9절).
빛은 언제나 어둠에 숨겨진 것들을 들춰냅니다. 들춰진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것을 거스르는 것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자백입니다.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문을 다 여는 것과 조금 여는 것은 다릅니다. 문을 활짝 열지 않으면 빛이 들어오는 만큼만 볼 수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온전히 들어오도록 문을 열 때 온전한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가 얼마나 죄가 큰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선해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엄청난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400년에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는 주후 396년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지도자가 되자 사람들이 그의 과거를 들추며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을 끌어내기 위해서 과거를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참회록을 쓴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변호하지 않고 참회록을 썼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회심할 때까지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훌륭한 점입니다.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대단한 영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개의 서신을 썼는데 그 서신들 중에 자신에 대한 고백이 종종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직후부터 마지막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의 여정을 보낼 때 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 시기에 나쁜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더 선한 사람이 되고,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가면 나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종교계 노벨상인 ‘템플턴 상’을 받고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잘못된 일을 했는지를 회개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80세 생일 때 후배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저를 그러게 높이지 마십시오. 저는 80년 묵은 죄인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이런 고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악함과 부패한 본성을 깊이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회개할 것이 많아지고, 고백할 것이 깊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맺은 약속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자백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고백과 반복적인 자백으로 더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야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의 조건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자백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자백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함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생명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