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참으로 살아나셨다
이재훈 목사
누가복음 24:25~35
“주님은 참으로 살아나셨다!
주님이 나의 동행자가 되어 주신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까닭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부활이 가져온 결과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활에 대한 설교는 부활절에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부활을 전파하는 사람들의모임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부활을 전파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들의자격조건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때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느냐가 그 기준이었습니다.
부활, 또 다른 자연세계
부활은 죽음에서 잠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멸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의부활, 영의 부활도 아닙니다. 몸의 부활, 육체의 부활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바로 그 몸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것이 부활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이 빠진 기독교를 원합니다.역사적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활의 기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부활을 신화라고 여깁니다. 만들어지고 조작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자연세계만이 실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체험하는 자연만이 진정한 실재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편견이요,선입견이요, 철학적인 고집일 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자연 너머의 자연이 있습니다. 초자연적이지만 그것 자체가 체계화되고,다양화된 실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 외에 또 다른 자연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1차원에서는 2차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차원에서는 3차원의 입체적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3차원 세계만 있다고 하지만 그것과 또 다른 4차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차원에서는 인간의 차원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동물이 경험하는세계가 실재의 전부라고 한다면 인간이 보기에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만이 실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는그 세계가 전부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왜웁니까. 두려워서 우는 것입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두렵고, 새로운 세계로들어가는 충격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의 출생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듯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에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문학가 C.S.루이스는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자연이 열린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경험하는 자연 외에또 다른 자연의 문이 열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곳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영혼이 거하는 곳인지를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물리적인 공간입니다. 예수님은그런 의도로 이 단어를 쓰셨습니다. 우리가경험하는 자연과 전혀 다른 또 다른 자연이준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곳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천국은 영혼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또 다른 자연세계입니다. 구체적인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영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이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자연의 세계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새로운 자연이 열린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그 새로운 자연이 약속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새로운 자연이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 다른 것을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보면 음식을 드실 수도 있고, 걸으실 수도 있고,대화할 수 있지만 우리와 다른 몸의 상태를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이 닫혔으나 들어오실 수 있지만 그분은 유령이 아닙니다.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자연상태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요란스럽게 선포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서 빛이 비추듯이 매우 조용하게 시작했습니다. 부활이 조작된 것이라면, 부활이 있지도않은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여러 가지 모순된 기록들이 나타났을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반가워하며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모습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경험한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믿기 어려워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의심했고,불신했고, 두려워했습니다. 마치 갓난아이가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두려워서 울듯이 그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고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각기 다른 사연이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의심하는 도마에게, 배신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람이 누군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가 ‘ 글로바’ 인 것은 알겠는데 복음서에 나오는 글로바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제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그룹 가운데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해보이고 부각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아닙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끼어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몸이 과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인간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 가운데 있는 모습과 차이가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육신을 가지셨기에 피곤하셨고, 우리와 같은삶을 사셨기 때문에 영광스럽게 된 모습과는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선뜻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부활하면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연약합니다. 병든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면 온전해 집니다.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못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요?’ 그들은 슬픈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15~17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 눈이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보는 눈은있지만 눈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이유를 17절 마지막에 ‘ 슬픈 기색으로’ 라고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슬픔이 눈을 가린 것입니다. 여러분, 슬픔은 눈을가립니다. 슬픔은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슬픔은 내가 있는 상황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합니다. 깊은 슬픔에 빠지면 내 옆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아는 사람인데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깊은 슬픔이 그들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
왜 그들이 슬픔에 빠져 있을까요. 예수님이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랐고,그들의 희망이요, 기대요, 소망이신 예수님이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으신지 3일이 지났기때문에 슬펐던 것입니다. 그토록 인자하고,능력이 많으시고, 말씀에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불의한 자들에 의해서 무고한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래서그들이 슬펐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거룩한 슬픔이라기보다 절망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거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뿐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3일째 됐는데”(21절).
여기서 구속은 죄에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말합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케 할 구속을 기대했던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산산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했고, 슬퍼했던 것입니다.그들의 슬픔은 불신에서 나오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게 믿는 사람들이여!’ ”(25절).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미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예수님을 만났다는막달라 마리아의 고백과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세 차례나 부활하신 예수님을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증거가 있었습니다.그들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디 믿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을 치유해 줄 수 있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더디 믿었기 때문에 슬픔에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무지에서비롯된 슬픔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그들은 정치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메시아를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였습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고난 받는 메시아요, 고난을 통과한영광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죄인들처럼 처참하게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 취급 받는메시아입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영광스러움이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그들의 무지가 슬픔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사람들을 만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겪고 있는 마음의 슬픔을 분석해 보면 절망, 불신,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왜 슬픕니까. 죽음에 얽혀 있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입니다.죽음을 넘어선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불신 때문에슬픈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절망하기 때문에 생기는슬픔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물리적으로 잘 살게 해주시는메시아로만 여기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절망에 빠지고, 그 절망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그런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슬픔이 오는 것이 아니라우리 마음에 세상에 속한 슬픔이 가득 차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세상의 슬픔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볼 때까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해 언급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설명해 주셨습니다”(27절).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을 자세히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귀와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의 말씀 풀어주심에 이끌려 길을 가던 중에 엠마오에도착했습니다. 함께 조촐한 식사를 하는 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함께 식사하던 중에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하시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아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30~31절).
그들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빵을 떼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회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을 보고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빵을 떼는 습관이 과거 예수님과 동일했기 때문에 알아보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 ”(32절).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그들의 마음이 말씀을 들으며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의 절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이 사라지고 무지가 깨어진 것입니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죽임 당하는 것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음을 깨닫고 무지와 불신과 절망과 슬픔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뜨거워진 것이 그들의 눈을 열게 한 것입니다. 눈을 열어야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지만 마음이 뜨거워져야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을 열어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게되었다면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임재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을 살아있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주실 때 “내가 부활했다. 나를 알아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간접적으로 말씀을풀어주심으로 제자들 스스로 눈이 열려 보게 하신 것처럼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임재하십니다. 이 말씀을읽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설명을 듣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눈을 열어 일상 속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식사할 때였습니다. 어떤 성례전을 거창하게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먹는 그 소박하고 조촐한 식사자리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절에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슬픈순간들, 절망적인 순간들, 낙심과 불안과 불신과 무지 속에사로잡히는 모든 순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때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주님은 참으로 살아나셨다! 주님은 나의 모든 인생의 동행자가 되어 주신다.”
이 확신이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도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슬픔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연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에서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부활의 놀라운 영광을 함께 누리고,우리의 믿음이 부활의 믿음으로 새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