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도피성

이재훈 목사

 

 

신명기 19:8~10

 

“도피성이 생명을 보호하고 운명을 책임져주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과 운명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 기준과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할수록 더 큰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보여주시는 정의로운 사회를 깊이 연구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로운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를 알려면 소득과 부의 분배뿐만 아니라 의무의 분배도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할 때 정의롭게 분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분배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지파의 인원에 따라 똑같은 크기의 땅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인 원칙은 제비뽑기였지만 자발적인 의사와 참여, 헌신에 따라 다르게 주어졌습니다. 요단 동편에 머물기를 원했던 지파들은 원하는 땅을 허락받았고, 갈렙과 유다 지파처럼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했던 지파들도 원하는 대로 헤브론 산지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의무는 다하지 않고 더 쉽게 더 넓은 땅을 얻으려고 했던 지파가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지파입니다. 그 지파에게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배정 받은 땅을 취소하거나 변경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땅의 분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는 기계적 분배가 아닙니다. 자발적 참여, 헌신, 그리고 의무의 분배까지도 고려되었습니다.

 

 

 

도피성과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이 보여주신 정의로운 사회는 죄에 대한 엄격한 징벌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실수에 대한 자비로운 용서까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는 ‘ 도피성’ 이라는 제도를 만들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타난 모든 율법들을 요약하고 정리한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에도 등장합니다. 모세오경에 이 제도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요단 서편에 도피성 세 개를 지정하셨고, 요단 동편에도 세 개를 지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행해지는 것을 관찰하고 계셨고, 어떤 제도보다 도피성을 강하게 시도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이 말씀을 여호수아가 잘 지키는지를 하나님이 주목하셨고, 여호수아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12지파의 땅 분배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을 건설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도피성은 대략 32km마다 1개가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든지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위치에 도피성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약 9개 정도가 지정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가는 길의 도로는 넓게 만들도록 했고, 곳곳에 안내판도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고 섬세한 배려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이 이 제도를 매우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도피성을 세우는 작업은 가나안 땅 분배의 클라이맥스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땅 분배의 절정에서 이루어진 일이 기념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을 세웠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회는 후기 청동기 사회입니다. 소수의 지배자들이 땅을 차지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든 사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곳곳에서 폭력과 소규모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폭력성은 공권력이나 경찰력, 법으로 제어하기 힘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도피성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용납하고 보호해 주고

 

 

첫째, 도피성 제도는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의도성이 없거나 실수인 경우에는 용납하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로운 정의입니다. 사람들은 복수하는 정의를 원합니다. 의도성이 없는 실수라도 정죄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라도 끝까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에는 실수에 대한 용납과 관용과 용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과보다 동기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동기와 과정보다 결과를 놓고 따지는 정의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결과보다 동기와 과정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의도하지 않은 사건인 경우에는 용납하고 보호하는 자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에는 언제나 자비가 있습니다.

 

 

어느 인디언 마을의 재판법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으면 재판을 하는데 방법은 이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죄를 지은 사람을 중앙에 세워놓고 한 사람씩 앞에 나와 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행했던 좋은 일을 한 가지씩 이야기 합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사건을 들춰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껏 무엇을 했는지를 돌아가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야기 하다 더 이상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것으로 재판이 끝납니다. 여러분, 이 재판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잘못한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정의아닐까요. 잘못한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서그 사람이 잘한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요. 저는 이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나친 복수심을 억제

 

 

둘째,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있는 지나친 복수심을 억제하십니다.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삶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 분노를 일으킵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자비와 긍휼이 사라집니다. 오죽하면 분노조절장애라는 질병까지 생겨 난 정도입니다. 자비와 긍휼에서 나온 정의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신명기 19장 후반부를 보면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마치 복수를 장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억제합니다. 여러분, 눈에 상해를 당한 사람이 마음대로 복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상대방의 눈만 상해하려고 할까요. 코와 입까지 망가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복수는 언제나가열되기 때문입니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은 개인적 복수가 아닙니다. 공적인 재판을 통해서 정확히 손해본 만큼 배상하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급한 분노가 아니라 절제된 분노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자비로우신 정의입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회복의 길을 주시는 진노입니다.

 

 

실수일지라도 치러야 할 대가

 

 

셋째, 비록 실수일지라도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은 실수를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 또한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했더라도 실수가 아니라 의도했던 일이라고 판명되면 바로 쫓겨났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도피성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 대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에서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만약 마음대로 도피성을 나가면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사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체가 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설화에 보면 대제사장의 어머니들이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극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못하도록 극진히 대접했다는 유대인들의 설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대제사장이 죽으면 실수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도피성에서 해방되는 제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대제사장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의도하지 않은 살인자의 죄 값과 대제사장의 죽음이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치루고 속죄하시는 사역이 연결됩니다.

 

 

도피성은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제도들이 있습니다. 지난주 살펴본 절기도 장차 오실 예수님의 아름다운 구속사역을 내다보는 제도입니다. 도피성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피성은 그냥 눈감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게 지은 죄 값을 치르고 살려주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대속적인 정의입니다. 값을 치르는 정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면죄 받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치러야 될 대가를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함께 이뤄지는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휼이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시는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두 눈 부릅뜨시고 우리의 죄를 감찰하시며 심판하시되 그 죄를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심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도피성에 피했던 사람들이 원을 받고 해방될 수 있는 원리와 동일합니다.“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도피성은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십자가 사역을 보여줍니다. 도피성의 문이 항상 열려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도피성은 어느 민족 사람에게도 열려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야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도피성이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늘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치외법권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대사관이 있는데 그 대사관은 그 나라 법이 함부로 지배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도피성입니다.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만 보호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도 받아주십니다. 어떻게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도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그분이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는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알고 지은 죄가 더 많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지은 죄가 더 많을까요. 그 모든 죄를 다 받아주실 수 있는 분이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 값을 다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을 아가는 사람은 때로 실패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보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 가까이 나아오는 자는 결코 쫓아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통해 죽임당할 사람을 살려주시고,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회복의 기회가주어집니다. 도피성이 생명을 보호하고 운명을 책임져주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과 운명을 책임져주십니다. 세상에는 죄를 짓고 도망가더라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안전합니다. 성경곳곳에 안내문이 적혀있습니다. 도피성으로 인도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시대 도피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실수와 고난 가운데 있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며, 이 시대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공급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도피성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십자가의 은총이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