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재훈 목사
신명기 20:1~8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공동체,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십시오.”
사탄의 중요한 전술 중 하나는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전투부대원들이 힘을 다하여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주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래서 늘 보급로를 염두에 두고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가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아주 무섭고 비열한 적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고립시키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이길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도박이 아닙니다. 도박은 세상에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보자는 생각입니다. 믿음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은 확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합니다. 믿음은 운에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은 더 큰 상대가 나타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바라볼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누군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늘 스스로 행복하다고 무턱대고 우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무턱대고 우긴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우기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대상이 가져다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마음을 아무리 강하게 먹는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면서 정복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있는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이스라엘보다 많은 민족과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원수들과 싸우기 위해 나가서 너희보다 많은 말들과 전차들과 큰 군대를 보게 돼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다”(1절).
그들 앞에서 떨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신앙은 영적 기억상실증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도 잊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현실이 아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면 그들은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가 싸움터에 나갈 때는 제사장이 앞으로 나아가 군대에게 연설해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오늘 너희는 너희 원수들과 싸우러 나가고 있다. 마음 약해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공포에 질리거나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와 함께 나아가 너희를 위해 너희 원수들과 싸워서 너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2~4절).
제사장들의 사명은 군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믿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나서 내리신 조치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울 수 있는 군사의 숫자를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더 많은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은 군인의 숫자를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장교들은 군대에 말하라. ‘ 새 집을 짓고 봉헌하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가게 하라. 그가 싸움터에서 죽어 다른 사람이 새 집을 봉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포도원을 만들고도 즐기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가게 하라. 그가 싸움터에서 죽게 돼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자와 약혼하고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가 싸움터에서 죽게 돼 다른 사람이 그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장교들은 군인들에게 말하라. 두려워하거나 마음이 약해진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해 그 형제들마저 낙담시키지 않게 하라’”(5~8절).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말씀을 후렴구처럼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로 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집을 짓고, 포도원을 만들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대가 있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조치들을 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함께하심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전염됩니다. 소수의 두려워하는 이들이 또 다른 사람을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사람의 숫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헌신된 소수가 없는 것입니다. “왕은 많은 군대로 구원을 받지 못하며 용사는 큰 힘에 의하여 구출을 받지 못하는도다”(시 33:16).
많은 군대가 있으면 왕이 더 힘이 있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들이 성경의 여러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에 쳐들어가서 대진하고 있을 때 블레셋의 병력들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습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 3천 명을 이끌고 갔지만 백성들은 두려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결국 6백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무기를 들고 있는 부하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 이리 와서 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부대에게로 가자. 여호와께서 도우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삼상 14:6).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요나단 시대에만 적용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수를 믿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힘과 능력이 연약해 보여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바라본다면 그 싸움과 역사는 승리하게 됩니다. 요나단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영성과 믿음은 한순간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는 고백을 가지고 블레셋 진영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 이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단이 보여준 믿음의 발걸음 이전에는 이스라엘 진영에 두려움이 가득했었는데 요나단과 병기든 자가 블레셋 진영으로 뛰어 들어 가고 나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적진에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지하라
똑같은 예가 사사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사사시대 기드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미디안 족속들을 너희에게 붙이려고 하는데 백성들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주셨던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는 백성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들을 넘겨주려고 하는데 백성이 너무많다’ . 이스라엘이 내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며 ‘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 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지금 너는 백성들의 귀에 선포하여라. ‘ 누구든 두려워 떠는 사람은 돌아서서 길르앗 산으로부터 떠나라. ’ 그러자 백성 가운데서 2만 2,000명이 돌아 갔고 1만 명만 남게 됐습니다’(삿 7:2~3).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사람은 돌아서서 자유롭게 돌아가라고 했더니 3만2천 명 중에서 2만2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3분의 2가 돌아갔습니다. 3분의 1만 남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기드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직도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거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를 대신해 내가 그들을 시험하겠다. 내가 ‘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라고 네게 말하면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라고 네게 말하는 사람은 가지 않을 것이다’”(삿 7:4).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입에 대고 핥아먹는 사람과 무릎 꿇고 먹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물을 핥아먹는 먹는 사람은 3백 명이고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3백 명만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분한 이유는 적은 쪽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만2천 명에서 3백 명만 남기셨습니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온누리교회에 주신 비전이 너무 커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힘이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내부에서 부패가 일어나고, 지리멸렬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많이 모이면 그때부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예산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숫자가 모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비전과 사명과 무게 앞에서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고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처럼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요나단과 병기 든 자 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적과 싸우겠다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온누리교회에 너무 많은 비전과 사역을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CGNTV, NGO 더멋진세상, 한동대학교 등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비전과 사역들을 감당 하려면 우리는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되어야 하고, 요나단과 병기 든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공동체로 똘똘 뭉치지 않고서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나 된 이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댁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밀가루 한줌과 기름 몇 방울 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정말 도와줘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의지하도록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안전지대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을 제거하시는 방법으로 군사 숫자를 빼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있어야 두려움이 사라질 것 같은데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두려움만 커질 뿐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을 뺌으로써 오히려 믿음이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을 끊으심으로써 담대한 믿음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던 것은 편안하고 안락한 평안과 번영 속에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다윗의 믿음이 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과 쓰임 받는 일꾼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3~4).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의 담대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떨어져나가고 주변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이가 없는 것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왜 두렵습니까. 가진 것이 많아서 두렵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많아서 두렵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제거하심으로 우리가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북군에 속해 있던 목회자들이 아브라함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북군의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북군 편에 서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많은 군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원을 줄이면서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