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조정민 목사 - 야고보서 5장 1~12절
조정민 목사
야고보서 5장 1~12절
외적 상황에 대처하는 성도의 자세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꿈과 비전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로 번영하고 성장하는 비결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어디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새벽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그리고 특별히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신앙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 받았고 공동체로 구원 받았고 공동체로 파송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를 건강한 공동체로 번영하고 성장하겠습니까. 입조심, 말조심해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 안에는 서로 자랑하는 일이 없어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므로 육신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성령충만은 어떻게 성령충만인 줄 압니까. 말이 달라는 지는 것입니다. 쓰는 말씨가 달라집니다. 어제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남 비방하지 말라, 그리고 내 자랑하지 말라. 그 두 가지면 공동체가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공동체에서는 남을 비방하는 소리, 정죄하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자랑하는 일이 없습니다.
남을 자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할 수는 있어도 내 자랑하고 남을 비판하는 그런 공동체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체가 건강하게 서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바로 빈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삼시세끼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하는 인간론적인 존재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할 것이고, 무엇을 입어야, 어떤 거처가 있어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빈부의 문제는 어느 때고 흡족한 정도로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빈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이고 하나는 공산주의적인 방식입니다.
무한히 욕심 충족시키겠다는 것은 비성경적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능력껏 벌어서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반작용으로 우리는 공산주의를 경험했습니다.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전체의 주안점을 두었고,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실험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남기고 72년 만에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문을 내렸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배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형평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두어서는 부 자체가 형성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빵을 키워놓고 보자는 방식과 키우는 것 보다 나누는 것이 낫다는 방식은 두 가지 모두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건강한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윤리적인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맘껏 추구하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내 마음과 내 능력대로 돈 벌라고 내버려두면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여러분, 끝없이 돈을 버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서는 얼마나 많은 탈락자가 생기고 얼마나 많은 약자가 소외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믿음에서, 성경에서 찾은 것입니다. 기독교적 윤리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재앙입니다. 가장 큰 재난이자 비천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여러분, 무한히 성장하고 무한히 욕망을 추구하는 시스템은 없습니다. 무한한 성장한다는 것은 암세포의 꿈일 뿐입니다. 암세포가 무한히 성장해서 생긴 결과는 무엇입니까. 숙주도 자신도 다 죽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우리 안에서 적당히 살면 그냥 살겠는데 이것이 끝없이 성장하니 모든 다른 기관들을 다 파괴시키니 우리 몸이 죽지 않습니까. 무한성장하겠다는 패러다임은 이 땅에서 불가능한 패러다임입니다. 무한히 욕심을 충족시키겠다는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한계를 정해주셨고 그 한계에 따라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지 않고서는 공동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동체에 대한 부의 기준,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말씀으로 질책과 권면을 하십니다.
부자도 고난을 겪는 이유
첫째 부자들에 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부자들이여, 여러분에게 닥칠 고난으로 인해 슬퍼하며 통곡하십시오.(1절)”
부자들에게 첫 번째 오늘 주시는 말씀은 언젠가는 고난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부를 축적합니까.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고난당하지 않기 위해서, 편안하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어지간한 것은 남에게 다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왜 고난을 겪게 되는지 2절부터 3절까지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슬어 여러분에게 증거될 것이며 여러분의 살을 불처럼 삼켜 버릴 것입니다.(2~3절)”
부는 축적되면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 자체에 대해서 성경이 나무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를 끝없이 쌓아가는 탐욕, 그 탐욕의 문제에 대해서는 냉정합니다. 그렇게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쌓이면 썩게 되고 옷은 좀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쌀도 쌓아두면 쌀벌레가 생기고 쇠도 금도 은도 녹이 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의 축적은 반드시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부를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밭을 가는 일꾼들에게 지불하지 않은 품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하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습니다.(4절)”
대개 과거에는 지주가 소작농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경우는 노임 착취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품삯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소유주와 근로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근로자의 몫을 적게 주고 싶고 본인 몫을 더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늘 그러한 갈등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
“여러분은 땅에서 사치하며 잘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도살의 날에 여러분의 마음을 살찌웠습니다.(5절)”
당시에 부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습니까. 원성을 들으면서 착취해서 잘 산다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잘 사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삽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못 살고 있는지 못 삽니다. 이것이 빈부의 격차입니다. 재스민 혁명이라고 하는 아랍의 혁명의 진원지가 튀니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월급 안 주니까,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불이 이집트로 옮겨 붙었습니다. 그곳의 인구 절반이 하루에 빵 한 조각으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작년에 빵 값이 두 배로 올랐습니다. 러시아에서 곡물가격이 50퍼센트가 폭등하는 바람에 전 세계에서 곡물값이 폭등했습니다. 그래서 밀가루를 사서 만드는 제빵 업자들이 빵 값을 두 배로 올렸습니다. 그나마 먹고 살던 빵 하나를 못 먹게 됐습니다. 그러니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추고 살래야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부자에게 반드시 닥칠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탐욕으로 축적하면 이런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노임을 착취하고 사치하고 교만하고 둔감하고 무감각해지면 이웃이 어떻게 살든 저렇게 살든 나하고는 관련이 없다는 그런 상태, 마음에 살이 찌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먼저 살이 찌지 않도록 조심
여러분, 마음에 살이 찐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먼저 살이 찌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부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경주 최부자 일화 알시죠. 그 집이 오백년 동안 부를 유지했습니다. 여러분 부자는 고난을 당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분들 고난이 왜 없었겠습니까. 경추 최부자 이이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운 삶이 있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훈이 만석이상 부를 축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석은 1년에 30억 이상은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면 다 돌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 가훈입니다. 내 주위의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 같이 잘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도 성경 말씀 아닙니까. 며느리를 들일 때 은비녀 이상 못해오게 하라는 것도 잘 기억하십시오. 며느리를 받는데 금비녀도 아니고 은비녀 이상은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부자집은 이런 가훈도 세웠습니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은 양반은 되지만 권력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함께 쥐려고 하지 말라는 말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그래서 그냥 사방에서의 존경이 대단했습니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는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사회적 책임도 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존과 상생의 정신이 아닙니까.
오늘날 그런 부자가 어디 있습니다. 그만큼 지혜롭게 부를 관리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부자가 없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돈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비전과 꿈을 좇다가 돈이 생겼을 뿐이지 돈 때문에 그 길을 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포드가 돈 몇 푼을 벌려고만 했다면 왜 큰 자동차 기업을 세웠겠습니까. 빌게이츠가 돈이 욕심이었다면 지금 그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도 있는데 왜 재단을 세워서 암 환자를 위한 지원을 하겠습니까. 그가 꿈꿨던 꿈은 모든 가정의 책상마다 PC를 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겠다는 그런 것이 꿈이었습니다. 포드는 모든 집마다 자동차를 갖게 하겠다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 꿈과 비전을 추구하다가 생긴 돈에 탐욕이 생기겠습니까.
탐욕은 자기의 종아리 살을 베어먹는 것
탐욕이란 자기 발밑에 무덤을 파는 행위입니다. 탐욕이란 자기가 뭍일 줄 모르고 끝없이 자기 발밑을 파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비유를 합니다. 탐욕은 자기의 종아리 살을 베어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탐욕스러움이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부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돈으로 교회를 세우고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지에 질병과 가난을 퇴치하는데 사용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땅의 열매를 참고 기다리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고 여러분의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7~8절)”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인내하라는 것, 참으라는 것입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가난해지면 못 참습니다. 사흘 굶어서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못 참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인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음을 굳건히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 음없이 마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말씀은 혁명을 일으키라고 하지 않아
“형제들이여,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서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십니다.(9절)”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난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불평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청빈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청부를 비난한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내가 불평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하면 남 핑계를 많이 댑니다. 사회적인 구조나 부조리에 대해서 늘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통해서 모든 시스템을 평등 시스템으로 가져갔지만 부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해결되지 않습니다. 불평을 가지고는 비난을 가지고는 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내를 하되 언제까지 인내를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내가 인내하면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부자에 대한 경고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임금을 착취하고 그렇게 탐식하게 만들면 그 부도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를 비난하고 빼앗아 온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성경말씀은 혁명을 일으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뒤엎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자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고 선지자의 인내를 심지어 배우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스가랴나 그런 고난을 받다가 순교를 했지만 그런 인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빈부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각자 지켜야 할 금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둘 다 파멸할 것입니다. 공멸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내에 대해서 “나로 말하자면 발이 걸려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내가 악인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시 73: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 그때서야 결론을 얻었습니다. 주께서는 정말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워 두셨고 멸망에 던지셨습니다. 그들이 멸망하는 게 얼마나 갑작스럽던지! 그들이 공포에 완전히 휩쓸려 버렸습니다! 오 여호와여,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 사라지듯 주께서 깨어나시면 그들을 형상조차 무시하실 것입니다.(16~20)”
예수님 만나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 없는 공의라면 그 공의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있는 사랑입니다. 붙어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왜 부를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돈 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간다면 부는 따라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를 축적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어야 공존의 부가 가능하고 이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불균형이 있습니까. 저는 남미나 아프리카, 중동을 다니면서 ‘이 땅에 무슨 소망이 있나’하는 생각을 듭니다. 예수님 외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참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꿈을 좇고 비전을 좇다가 돈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돈을 자꾸 세어봐야 몇푼이나 되겠습니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벌어준 것입니다. 내가 셀 수 있으면 내가 번 것입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불어나기를 바랍니다. 단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꿈과 비전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정성진 기자 jun@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