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6일_ 이기원 목사
5월 16일 이기원 목사
신명기 25장 1~10절
가난한 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돈의 빈곤이 아닌 사랑의 빈곤입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혀끝으로 말하지만
참 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함과 진실로 사랑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화 <울지마 톤즈>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 수단 오지에서 자기의 삶을 바치고 순교한 이태석 신부님의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제가 그 영화를 본 분들이 올린 소감을 읽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나는 영화다. 종교를 떠나서 가슴이 찡한 여운이 남는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 수녀가 죽었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는 “하늘과 땅도 울었다”는 글을 실었습니다. 수천만의 인도인들이 슬퍼했고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 캘커타의 작은 도시에서 그녀의 평생을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녀는 “기도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와 마더 테레사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평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들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신명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사가 계속해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사실 예수님은 여러 번 우리가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 언급하셨습니다.
죄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돌보아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24장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이방인, 고아, 죄인, 과부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돌보라 하십니다.
여러분, 죄인들은 죄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죄인들을 처벌할 때에 태형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말싸움이 붙었을 때 법정으로 데리고 가거라. 그러면 재판관들이 그 문제를 판결해 죄 없는 사람은 석방하고 죄지은 사람은 정죄할 것이다. 만약 죄지은 사람이 맞아야 한다면 그 재판관이 그를 자기 앞에 눕히고 그 죄에 알맞은 만큼 매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매질이 40대를 넘지 않아야 한다. 만약 40대 이상 매질을 한다면 네 형제가 너를 비열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1~3절)
왜 죄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요?
첫 번째 이유는 죄인들을 처벌하는 목적이 죄인들이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바뀌면 안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사람들이 볼 때 비열할 정도로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일입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화가 난 상태로 교실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학급의 문제아를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대자루를 꺾어서 학생에게 이야기합니다. “몇 대 맞을래?” 그때 이 학생이 엉겁결에 “50대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모두 다 놀랐습니다. 이 학생은 이때부터 맞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걷지 못해서 부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교실에 있는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학생이 그렇게 많이 맞으면 회개하고 착한 학생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이 학생이 상처를 받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학생이 여러분의 자녀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벌은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난 무리들이 한 여인을 죽이기 위해 돌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돌을 던지는 데 아무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하고 싶으셨습니다. 돌을 던져서 죽이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온전하게 율법을 완성하고 싶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죄인에게 돌을 들지 말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죄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죄인일지라도 우리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여기에 앉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함부로 다루시고 모욕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소가 추수를 위해 곡식을 떨려고 밟고 있다면 재갈을 물리지 마라.”(4절)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곡식을 탈곡할 때 타작마당에 소를 풀어놓고 그 소가 곡식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소가 곡식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그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인들 중에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작마당을 밟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수고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본문 말씀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일꾼은 그가 너희의 형제든 네 성문 안 네 땅에서 사는 이방 사람이든 압제하지 마라. 그에게 그날 해 지기 전에 일당을 주어라.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그 일당에 급급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에 대해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니 네게 죄가 될 것이다.”(신 24:14~15)
지금 통계상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수는 60만 명이고, 불법적으로 체류하는 근로자까지 포함하면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중에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근로자가 2010년 통계에 의하면 1만 명에 가깝고 그 금액은 200억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집계가 이 정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부천 온누리교회의 한 집사님은 김포에서 한 공장을 운영합니다.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은 네팔이나 파키스탄 등지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이 집사님이 이들을 위해 얼마 전에 외국인예배를 개설했습니다. 마침 횃불트리니티의 전도사님이 계셔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한 노동자들과 이방인을 착취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들도 노동자이자 근로자이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과부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례 결혼에 대해 나옵니다.
계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만약 형제 중에 한 명이 자녀 없이 죽었을 때에 그 형이나 동생이 그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도를 허락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으면 죽은 이의 과부는 나가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 그 남편의 형제가 그녀를 데려가 결혼해 형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여라. 그녀가 첫아들을 낳으면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해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여라.”(5~6절)
하나님께서 계례를 허락하신 첫 번째 이유는 죽은 형제의 대를 잇고 그 형제의 기록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이 여인이 이방인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녀 없이 홀로된 과부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형제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해야 했습니다.
“과부가 된 그 형제의 아내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로 올라가 신발 한 짝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제의 대를 잇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여라. 그 사람은 대대로 이스라엘에서 ‘신발이 벗겨진 가문’으로 알려질 것이다.”(9~10절)
신발이 벗겨졌다는 것은 의무를 포기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신발이 벗겨진 가문은 불명예스러운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의 가문이 수치와 불명예를 감당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재산의 상속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형제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돌보는 의무를 감당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형제의 재산을 탐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 공동체, 교회, 사회 안에서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는 바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처럼 홀로된 사람,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더 테레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 아니라, 허리 숙여 상처와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이자 이방인이기 때문에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돈의 빈곤이 아닌 사랑의 빈곤입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아닌 사랑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혀끝으로 말하지만 참 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함과 진실로 사랑을 행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